[르포] 몰려드는 中 관광객… 서울인지, 홍콩인지 헷갈릴 정도
입력 2013-10-22 05:26 수정 2013-10-22 16:01
1시간도 채 안 됐는데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윗옷이 땀으로 젖었다. 익숙하던 중국어가 입에서 꼬여 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시 관광안내입니다!”(? 好, 首爾旅游咨詢服務!:니하오, 셔우얼뤼요우쯔쉰푸우)
일요일인 13일 낮 12시 서울 명동 우리은행 앞 사거리에서 빨간 모자와 셔츠를 입었다. 한국관광협회가 운영하는 ‘움직이는 관광안내소’의 안내원 유니폼이다. 기자는 중국어 담당 일일자원봉사 안내원이 됐다. 정려홍(23·중국어) 장지혜(27·일본어)씨와 한 팀을 이뤘다. 오가는 관광객들에게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목청 높여 인사를 했다.
겨우 세 번 외쳤는데 길을 묻는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씨와 장씨는 지도를 꺼내 형광펜으로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표시해주며 설명했다. 기자에게도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맛있는 찜닭집이 어디냐.” “○○삼계탕에 가려 한다.” “○○마사지숍 위치를 알려 달라.” 낭패감이 밀려 왔다. 이렇게 자세하게 명동 구석구석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 중국어는 알아듣겠는데 명동에 대해 그들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지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관광객들은 이내 정씨에게로 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인지 식당을 묻는 관광객이 많았다. 찜닭 닭갈비 설렁탕 등 한국음식을 맛보려는 사람들이었다. 30대 중국인 여성 관광객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맛있는 음식점을 추천해 달라. 칼국수 닭갈비 삼계탕 삼겹살 찜닭은 다 먹어봤다. 다른 건 없느냐”고 물었다. ‘뭘 더 먹으려고…’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정씨도 이 질문에는 당황한 듯 잠시 생각하더니 “죽과 비빔밥을 잘하는 식당이 있다”며 안내했다. ‘순두부찌개’같이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서민 음식을 찾는 이도 종종 있었다.
짜장면을 찾는 중국 관광객은 주로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정씨는 “중국식 짜장면과 다른 독특한 맛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퍼져 한국여행 때 꼭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지도를 꺼내 설명하는 데 제법 익숙해졌다. 명동성당, 지하철역, 백화점 등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 자신이 붙었을 무렵, 20대 중국인 여성 2명이 “진산순 계단이 어니냐”고 물어 왔다. 처음 듣는 ‘진산순’이란 말에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정씨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남산으로 가는 길을 설명했다. ‘진산순’ 계단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오는 장소였던 것이다! 진산순은 김삼순의 중국식 발음이었다. 정씨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는 관광객이 많아 몇 군데를 숙지해 뒀다”고 한다. 중국의 한류 드라마 열풍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오후 3시쯤부터는 문화상품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이 늘기 시작했다. 주로 음반매장과 한류 상품 매장을 찾았다. 유명 아이돌 그룹이 광고 모델로 나선 업체의 매장을 방문하려는 관광객도 끊이지 않았다. 한 30대 중국인 남녀 관광객은 “‘런닝맨’이 TV에서 몇 시에 방영되느냐”고 질문했다. 이 SBS 예능프로그램의 방영시간을 정씨는 외우고 있었다. “그런 것까지 외우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인기 TV 프로그램 시간을 묻는 질문이 의외로 많다. ‘런닝맨’에 나온 물병을 어디서 파느냐는 질문도 들어봤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동 거리는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여기가 명동인지, 홍콩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관광객들은 안내를 받기 위해 줄까지 서서 기다렸다. 일본어 담당인 장씨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휴일에는 보통 시간당 100∼150명, 많을 때는 200명 넘게 안내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황당한 중국인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안내 도중 갑자기 지도를 한 뭉텅이로 뽑아가거나 갑자기 끼어들어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장씨는 “2개월 전에는 한 옷가게 앞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대변을 보게 하는 장면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여유법’을 제정해 해외 관광 피해를 차단하는 한편, 해외로 나가는 이들에겐 현지 예절을 지키도록 독려하고 있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최근 “중국인 여행객들은 현지 법률과 풍속을 존중하고 현지인들과 조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오후 7시 안내원 활동이 끝났다. 이날 명동에서 안내원 10여명이 상대한 관광객은 2806명으로 집계됐다. 그중 중국인이 856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본인(851명)이 뒤를 이었다.
‘움직이는 관광안내소’는 자원봉사자의 참여도 받는다. 기자와 함께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현직 공무원 A씨(51)는 “젊은 시절 영어관광통역사 자격증을 땄지만 활용을 못해 아쉽던 차에 인터넷 공고를 보고 바로 신청했다”며 “6개월간 활동하니 명동의 명소 450여곳을 막힘없이 안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