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의구] 빛나는 가을날 친구를 여의고

입력 2013-10-21 18:12


여의도 교회 부근을 지나다 보면 구걸하는 이를 가끔 만나게 된다. 잃은 다리를 긴 고무바지로 감싼 채 엎드려 작은 수레를 밀고 다닌다. 그를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남다른 행색 때문이 아니다. 모금함 아래 설치된 조그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이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때론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등의 찬송가나 복음성가다. 낮은 음색의 남성가수는 느린 박자로 노래한다. 화려한 음색이나 기교가 없고 고음부에도 감정을 넣어 음량을 키우지 않는다. 책을 읽듯 잔잔한 노래는 그런데 심금을 울린다. 청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슴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전달하려 애쓰지 않는 탓에 오히려 부르는 이의 진정이 느껴진다.

자기주장 고집 않는 소박한 삶

그 노래들처럼 목소리가 낮았던 친구가 지난 18일 세상을 떴다. 대구에서 작은 가내공업을 하는 집안의 둘째아들이었던 그를 고교시절 교회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일에는 열심을 다하면서도 남에게는 강요도 충고도 하지 않았다. 함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 교회를 떠나 술집을 서성대던 내게도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술잔을 들지 않았지만 남이 술 마시는 것을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남의 얘기를 들어주거나 가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원칙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성사회에 대한 비판은 공유했지만 도그마를 세우는 데 반대했다. 그의 관심은 특정한 이념을 내걸고 그에 따라 연역적으로 삶의 원칙을 세우기보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영혼과 지성이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삶을 최선을 다해 사는 데 있었다.

유독 그의 결혼조건은 까다로웠다. ‘그저 사랑하면 된다’는 통속적인 결혼관과 달리 3대째 믿는 집안을 고집했다. 모태신앙의 여성과 가정을 꾸려 늘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며 평생을 보내고 싶다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명문대를 나오고 번듯한 직장에 다녔지만 그런 신부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40대 초반이 돼서야 결혼했다.

10년가량 세월이 흐른 지난해 초여름 그는 암 진단을 받았다. 세계에서 수천명만 걸린다는 희귀암이었다. 항암치료는 듣지 않았고 조금씩 쇠약해져갔다. 두 달 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통증이 심했고 남겨질 초등생 두 딸이 큰 부담이었을 텐데 그가 보내오는 문자메시지에는 한탄이나 불평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는 꼿꼿한 정신으로 글을 썼다. 그 아내는 모진 병과의 싸움에 큰 힘이 됐다.

신실하게 살라는 울림 남겨

지난 목요일 “남편이 곧 천국갈 수 있다고 합니다”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는 응급실에서 이미 의식이 없었다. 손을 잡아주고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내는 “사흘을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사흘 만에 살아나셨잖아요”라고 했다.

다음날 밤 친구의 휴대전화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남편이 오늘 천국으로 이사갔습니다. 남편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라기보다는 본향으로 돌아갔다는 게 더 맞아보였지만 어쨌든 부부가 병고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쉰두해인 그의 육신은 나흘장을 끝내고 흙으로 돌아가 경북 청도의 나무 아래에 묻혔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영혼은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그의 생애는 낮지만 강한 울림을 전한다. 온갖 이해관계와 채색된 이념들이 충돌하는 잡음으로 가득한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죽음 앞에 홀로 서게 될 순간을 기억하라는 청량한 목소리다. 그다지 두드러지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길지 않았던 생애는 신실한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믿음을 남겼다.

김의구 편집국 부국장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