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나들 (5) 간경화 치료 위해 40일간 전원서 주님과 대화를
입력 2013-10-21 17:25 수정 2013-10-21 17:35
일기예보를 해체한 후 본격적인 투병을 시작했다. 한번 나빠진 간은 다시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한 치료는 없었다. 간경화는 의학적으로 불치병이었다.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당시에도 간이식 수술이 이뤄지긴 했지만 막 도입단계였다. 수술비만 해도 수억원이었고 성공률도 아주 낮았다.
설사 수술비를 마련하고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는다 해도, 그 뒤에 들어가는 병원비와 약값 때문에 치료는 언감생심이었다. 재벌이 아니면 간 이식 수술은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생명연장 차원의 마지막 방법이 수술이었다.
나는 자연치유 요법에 집중했다. 아내는 생식과 채소, 과일 등 간에 좋다는 음식은 모두 구해다 먹였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한 지인이 생식 권위자로 유명하다는 김 모 박사를 소개했다.
“김 박사라고 들어봤어? 생식 권위자인데, 김 박사라면 간 경화를 반드시 고칠 거야. 희망을 품고 반드시 만나봐.”
안 만나볼 이유가 없었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데, 낫는다면 못 할 게 없었다. 나는 바로 연락했다. 김 박사는 완전히 고칠 수 있다고 단호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다만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하라고 했다.
첫째, ‘음식 공해’를 피하라. 즉, 즉석 음식을 먹지 마라, 불에 익혀 죽은 음식을 먹지 마라, 살아있는 생식을 하라고 했다. 둘째, ‘환경공해’를 피하라. 탁한 공기와 오염된 물이 환경 공해였다. 무엇보다 도심을 벗어나라고 했다. 셋째, ‘사람 공해’를 피해라. 인간관계가 스트레스의 주범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했다.
김 박사는 이 세 가지를 철저히 지키면 간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건만 된다면 공해와 사람을 피해 당장 깊은 산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의 자신 있는 말에 나는 그대로만 하면 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김 박사는 생식을 세계 최초로 만든 분이었다. 대체의학계에서는 이미 권위자로 이름 나 있었다. 나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사람 공해를 피한답시고 그동안 함께 작업했던 음악 동료들에게조차 행선지를 숨겼다. 오직 가족에게만 연락처를 남기고 쥐도 새도 모르게 서울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마이산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진안의 한 마을이다.
전원생활은 난생처음이었다. 가장 큰 고민은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비록 부하진 않았지만 여유가 있었다. 나는 성경 정독을 시작했다. 성경과 주석을 함께 펴놓고 이해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한 줄 깊이 묵상하며 읽었다. 어떨 땐 성경의 한 문장을 갖고 온종일 씨름했다.
40일 작정 새벽예배도 처음으로 도전했다. 아침저녁으로 산자락을 혼자 걸으며 하나님과 대화도 했다. 시골에서는 시간의 여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이런 생활이 하루하루 쌓여가자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의 은혜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내 삶 속에서 항상 함께 하신 하나님을 알게 됐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온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간의 전원생활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됐다.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꿈과 비전이 생겼다. 어느 때부터인가 건강에 대한 염려마저 사라졌다. 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도 아내와 나는 두렵지 않았다. 우린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것을.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