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실화의 경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다… 코리아나미술관 기획전 ‘텔 미 허 스토리’
입력 2013-10-20 17:13
미국 애리조나 농장에서 양상추를 수확하고, 인도 카레라 공장에서 라텍스를 생산해내는 노동자는 대부분 아시아 여성들이다. 좁은 공장에서 몸을 밀착시킨 채 쉼 없이 일하는 이들의 노동은 양배추와 라텍스 그리고 화장품이 뒤섞인 ‘혼합물 큐브’를 만들어낸다. 아르헨티나 작가 미카 로텐버그(37)는 글로벌 시대 값싼 아시아 여성의 노동력을 ‘스퀴즈(Squeeze·쥐어짜다)’라는 영상작품에 담았다.
핀란드 작가 살라 티카(40)의 영상작품 ‘파워(Power·힘)’는 권투시합에 몰입한 남녀의 모습을 통해 인간관계와 권력의 문제를 얘기한다. 덩치 큰 남자와 가슴을 드러낸 젊은 여자의 격렬한 권투 경기가 영화 ‘록키’의 사운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여성의 펀치를 남성이 쉽사리 막아내지 못한다. 여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남성의 시선에 강펀치를 날리는 작품이다.
현대미술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불평등한 성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거나 전복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성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담론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전시를 열어온 서울 강남구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기획전 ‘텔 미 허 스토리(Tell Me Her Story)’를 12월 14일까지 연다.
전시는 3가지 주제로 나누어 국내외 작가 15명(14팀)의 영상·사진·설치 등 20여점을 선보인다. 출품작들은 여성의 정치·사회적 경험이나 자전적 얘기, 소설·영화·신화·동화 등을 토대로 구성됐다. 허구와 실화의 경계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다. 단지 ‘착한 여자’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부당함과 권력에 대항해 싸우는 ‘나쁜 여자’ 이야기까지 포함시켰다.
이란 작가 쉬린 네샤트(56)는 장편영화 ‘여자들만의 세상’을 소개한다. 2009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으로 1953년 이란 쿠데타 당시 여성 4명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삶과 정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세르비아 작가 마리나 아브라모빅(67)은 부엌에서 공중 부양하는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부엌’ 시리즈를 통해 여성의 역할과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르헨티나 작가 니콜라 코스탄티노(49)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을 만들어 임신과 출산 과정을 함께하는 설정의 영상작품 ‘트레일러’를 출품했다. 사랑과 미움의 감정 사이를 오가는 여성 심리를 표현했다. 한국 작가 홍영인(41)은 ‘출근길에 여자가 앞을 가로막으면 그날은 입갱을 않는다’ 등 남성 광부들이 여성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드러내는 글을 수놓은 작품을 내놓았다.
미술관과 같은 건물에 있는 화장박물관에도 현대미술품이 전시된다. 족두리를 쓰고 있는 토끼를 형상화한 김나영(한국)&그레고리 마스(독일)의 ‘위험한 관계’, 남자 역할을 하는 여성국극 배우를 영상에 담은 한국 작가 정은영(39)의 ‘분장의 시간’이 재미있다. ‘꽃으로 태어나 보배를 품었네’라는 제목으로 한·중·일 미인도와 삼작노리개, 아기저고리 등이 출품됐다. 관람료 2000∼3000원(02-547-9177).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