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예수님의 승천을 묵상하다
입력 2013-10-20 17:23
한 초등학생이 주일학교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면, 구름을 타기까지 우주에서 구름 까지는 무얼 타고 오시나요?” 이 아이는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셨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했던 질문이다. 선생님은 이 아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을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이 무엇인가? 목성, 토성을 넘어서 저 우주 끝으로 이동하셨다는 뜻인가?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의 본질은 ‘공간이동’이 아니라, ‘차원이동’이다. 가령 물고기가 담긴 어항이 있고, 그 어항에 코를 대고 쳐다보는 꼬마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물고기와 물고기’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물고기와 꼬마’ 사이의 거리는 공간상 가깝다. 코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고기와 꼬마가 존재하는 차원은 전혀 다르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속은 세계 전부요 모든 것이다. 물속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 그건 전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꼬마가 보기에 물속의 세계는 전부가 아니다. 물고기는 분명히 가까이에 있지만 전혀 다른 차원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꼬마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이와 같다. ‘공간이동’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신 ‘차원이동’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도 얼마든지 하늘과 땅을 오가셨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늘에 이미 들어가셨고, 하늘과 땅, 두 차원을 오가셨다. 그런데 왜 승천인가? 승천은 공적 선언이다. 즉 공식적인 재림 때까지 수시로 나타나지 않겠다는 공적 선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지만 않는 것이지, 사실은 아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승천이 단순한 공간이동 아닌, 차원이동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어항에 코를 대고 있는 아이처럼 예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신다. 그 증거가 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실 때, 도마의 말을 이미 다 듣고 계셨다. 차원을 달리하여 존재하셨지만, 도마의 말을 그대로 옮기실 정도였다. 제자들과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셨지만, 사실은 제자들 가까이에 존재하신 증거다. 도마의 말을 바로 옆에서 들으시던 그 주님은 지금 내 말도 바로 옆에서 다 듣고 계신다. 다만 재림 때까지 수시로 나타나지 않으실 뿐이다.
생각해보라. 그러므로 주의 재림은 너무 쉬운 일이다. 커텐을 제치고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이 왜 그렇게 재림을 가깝게 느꼈을까? 그건 재림의 시간을 가깝게 느낀, ‘시간적 가까움’ 보다는 ‘관계적 가까움’ 때문이었다. 주님은 차원을 달리하여 존재하시지만, 지금도 바로 옆에 계신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묵상하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보이는 것 같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