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 실패한 삶 해부… 체호프 특유 체취 물씬
입력 2013-10-20 17:17
연극 ‘바냐 아저씨’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바냐 아저씨’가 오는 26일부터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이 작품은 ‘갈매기’ ‘세 자매’ ‘벚꽃 동산’과 더불어 체호프의 4대 희곡으로, 국내에서도 꾸준히 무대에 올려졌다. 평범한 인물들의 실패한 삶을 통해 체호프 특유의 ‘일상성의 극대화’를 잘 보여준다는 평을 듣는다. 이 시대 대표적인 연출가 이성열과 배우 이상직이 만든 이번 무대에선 체호프의 일상성이 어떻게 구현될까.
주인공 바냐(이상직)는 조카 소냐(이지하), 노모와 함께 살며 평생 매부인 세례브랴꼬프 교수(한명구)의 시골 영지를 돌보며 살아온 인물이다. 노동을 천직처럼 여기고, 매부의 명성을 삶의 낙으로 삼는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골의 일상은 매부가 두 번째 부인 옐레나(정재은)와 함께 이곳에 나타나면서 물결이 치기 시작한다. 옐레나를 사랑하게 된 바냐. 그는 매부가 땅을 팔고 옐레나와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자 절망감에 몸부림치다 급기야 권총으로 매부를 쏜다. 하지만 총알은 빗나가고, 누구 하나 예외랄 것 없이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너무나 사실적이라 더 부조리해 보이는 체호프식 일상이지만, 그것을 표현해내는 체호프의 긍정성에서 한 가닥 희망을 보게 된다.
그동안 ‘굿모닝? 체홉’ 등 우리 현실에 맞는 체호프 무대로 호평 받아왔던 연출가 이성열은 체호프의 일상을 ‘새로운 일상’이라 칭하며 독자적 해석을 시도한다.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이성열은 “똑같은 사물도 현미경으로 볼 때와 상공에서 볼 때가 다르듯, 일상도 다르게 느껴지고 그려질 수 있다”며 “일상 속의 극적인 요소를 뽑아 그것을 통해 서사를 구성하는 일반 극과 달리 체호프의 극에선 표면적으로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일은 인물의 내면세계에서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연극은 연출이 아닌 배우 중심의 극이 될 전망이다. 바냐가 매부를 향해 총을 쏘지만 불발된다는 특별한 서사를 제외하고는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성열은 국립극단 출신으로 탄탄한 연기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최근 전남 구례에서 귀농 생활을 하고 있는 배우 이상직이야말로 적임자라 생각해 농사꾼 바냐 아저씨 역을 맡겼다. 이상직은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일상성을 어떻게 수면 위로 끌어올려 기존의 연극과는 다른 반대의 힘을 보여줄까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은 중간 휴식 없이 2시간 20분간 진행된다. 오종우 성균관대 러시아어문과 교수의 번역본을 전문작가 동이향이 윤색했다. 대사를 압축해 그만큼 시적인 맛이 강조됐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가장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100여 년 전 등장인물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적잖을 듯하다.
극 중 바냐는 이렇게 절규한다. “어떻게 좀 해줘! 아 젠장. 내 나이 마흔일곱이야. 예순까지 산다 해도 13년이나 남았어. 뭘 하면서 그걸 채워? 남은 인생을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맑고 조용한 아침에 눈을 떠 내 인생이 다시 시작하는 걸, 지나간 모두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느낄 수만 있다면.” 지나간 내 인생을 왠지 헛산 것 같고, 지금이라도 무언가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연극은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6일부터 11월 24일까지. 평일 7시30분, 주말·공휴일 3시. 관람료 2만∼5만원(1644-2003).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