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 결정 된 노량진 청과물도매시장 가보니… 대형마트에 밀려 역사속으로
입력 2013-10-18 18:16
한때 새벽마다 중개인 50여명이 목청 높여 값을 부르던 서울 노량진 청과물도매시장은 지금 인근 수산시장의 창고로 변했다. 2층 건물 입구에 페인트로 쓴 ‘노량진 청과도매시장’ 글씨는 풍파에 시달린 흔적으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18일 찾아간 시장에는 영업 중인 과일가게와 채소가게가 대여섯 곳뿐이었다. 45개 점포가 온종일 손님들로 북적이던 ‘서울 최대 청과물도매시장’의 위용은 사라지고 이제 하루에 1만원 벌기도 힘든 곳이 됐다. 인근 수산시장의 생선 비린내를 맡고 온 고양이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노량진 청과물도매시장이 결국 문을 닫는다. 서울시는 16일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시장 기능을 상실한 이곳의 폐지를 결정했다. 재개발이 되기 전까지 시장의 형태는 남아 있겠지만 사실상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1998년 외환위기의 거센 파도를 넘고 살아남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형마트의 공세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몰고 온 인근 수산시장의 불경기 여파에 시장으로서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곧 사라질 34년 역사의 전통시장은 적막했다. 구석구석 상인들의 아쉬움만 묻어났다. 청과물 상인 김형식(70)씨는 시장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서 과일을 팔았다. 40년이 넘는다. 시장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근 굴다리에 천막을 치고 노점을 했다. 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근처를 지나가며 어지러운 천막 노점을 모두 철거하고 건물을 지으라고 지시한 게 이곳의 시작”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큰돈은 못 만졌지만 여기서 벌어 세 자녀를 대학까지 보냈는데, 외환위기 이후 점차 가게들이 사라지더니 이제 과일가게는 세 곳만 남고 떠난 자리엔 창고가 들어섰다”고 했다.
과일 상인 김모(64·여)씨도 이곳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대형마트가 없던 시절엔 아침부터 과일 사러 오는 사람이 참 많았다”며 “과일상자를 가게에 가득 쌓아둔 채 팔았고 여기 상주하는 용달차만 10여대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엔 수산시장 상인이나 일식집 주인들이 해산물에 곁들일 채소나 사러 간간이 들를 정도였다. 그나마도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횟집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이젠 거래가 거의 끊겼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시장 안은 마치 지하실에 온 것처럼 고요했다. 백열등 몇 개만이 건물 안을 밝혔고 가끔 상가 구석에서 TV 소리만 흘러나왔다. 수산물 창고에서 생선 상자를 꺼내 옮기는 젊은 남성들이 오가지만 그들이 사라지면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30여년 채소를 팔아온 이모(60·여)씨는 “70∼80년대에는 대단히 활성화됐던 이곳 상권은 인근 영등포 등에 큰 상권이 생기면서 활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며 “이제 다른 곳에서 새로 장사를 시작할 용기도 없고 그저 죽을 때까지만 이곳에서 먹고살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노량진 청과물도매시장은 7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착공돼 79년 완공됐다. 2층 건물 3개동에 45개 점포가 들어섰다. 연간 청과물 처리량은 13만t이었다. 이제 조만간 철거한 뒤 재개발될 예정이다. 서울시는 노량진 수산시장과 연계된 개발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 기능은 폐지됐지만 재개발 전까지 가게 영업은 가능하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