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책 속에 숨어 있는 상상력

입력 2013-10-18 17:38


영화를 보고 난 뒤 원작인 책을 사서 읽을 경우 대개 실망한다. 책을 읽는 동안 영화 속 내용만 그대로 그려질 뿐 별다른 장면이 떠올려지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 후에 영화로 개봉되었을 때 본 경우는 어떨까. 이 역시 실망하는 수가 더 많다. 도대체 책과 영화는 왜 이렇게 따로국밥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 정답은 바로 상상력의 차이에 있다. 뇌과학자들이 MRI를 이용해 실험한 결과에 의하면 영화 감상이나 게임을 할 때보다 책을 읽을 때 뇌가 더 활성화된다고 한다. 영상을 볼 때는 앞쪽 뇌만 활성화되지만 책을 읽을 경우 앞쪽 뇌가 뒤쪽 뇌에 저장된 장면 조각이나 인물 등의 정보를 모아서 나름대로 한 편의 영화를 찍어댄다.

집중해서 책을 읽을 때는 언어를 이해하는 영역뿐만 아니라 감정과 기억, 심지어 신체 동작이나 촉감과 관련된 뇌 영역까지 활성화된다. 즉 독서에 열중하면 뇌만이 아니라 신체와 촉감까지 스토리 구조 속으로 들어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난 후 책을 읽으면 상상력이 아니라 영상의 기억력만 확인하게 되고, 책을 읽고 난 후 영화를 보면 혼자서 마음대로 펼친 상상력의 기대치보다 낮은 영상만 확인하는 셈이 된다.

똑같은 독서를 하더라도 문장구조가 복잡한 고전작품을 읽을 때 뇌가 더 활성화된다. 영국 리버풀대 연구팀이 셰익스피어와 월리엄 워즈워스 같은 고전 작가들의 작품 원본과 이를 요즘 말로 부드럽게 풀어쓴 개정판을 실험 대상자들에게 각각 읽게 한 후 MRI로 뇌의 변화를 촬영했다. 그 결과 고전 원본을 읽을 때는 뇌의 전기신호가 급증한 반면 개정판을 읽을 때는 전기신호의 발생량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

독서의 또 다른 장점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알고 배려하는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역시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미국 뉴스쿨대 연구팀은 대중소설이나 논픽션보다는 순수소설을 읽을 때 공감 능력이 두드러지게 높아진다는 논문을 과학저널 사이언스 온라인판에 게재했다. 대중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경우 대개 평면적이며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는 데 비해 순수소설에서는 현실처럼 속내를 알기 힘든 복잡한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10월 셋째 토요일인 오늘은 문화의 날이다. 굳이 복잡한 연구결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처럼의 서점 나들이를 하기에 딱 알맞은 날인 것 같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