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사만 이브라힘] 쓰레기마을 6만명의 새벽 찬송… 카이로는 매일 복음으로 깨어납니다

입력 2013-10-18 17:20


이집트 세계 최대 콥트교회 성시몬수도원교회 담임사제 사만 이브라힘 Samaan Ibrahim

세계 최대 콥트교회의 담임. 이집트 기독교 연합운동의 리더. ‘쓰레기마을’ 사람들의 친구이자 영적 아버지. 무슬림도 인정한 진실한 기독교인.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성시몬수도원교회 담임사제 사만 이브라힘(72)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다.

사만 사제는 최근 교회 관계자 10여명과 방한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초청으로 국제교회성장대회(CGI)와 기도 대성회에 참석했다. 첫 한국 방문이다.

지난 11일 서울 남산동 힐튼호텔에서 만난 그는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발끝까지 내려온 검은 사제복에 검은 모자가 눈에 확 띄었다. 풍성한 흰 수염은 검은 사제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십자가 목걸이는 유독 빛났다. 콥트교회가 한국교회에 낯선 것처럼 그의 복장은 이질적이었다.

성시몬수도원교회는 ‘동굴교회’로도 알려져 있다. 10세기 성 시몬 태너라는 수도사가 살았던 곳으로 나일강 남동쪽의 쓰레기마을로 유명한 모카탐(Mokattam) 언덕 위에 있다. 예배당은 동굴 안쪽에서 시작돼 수백미터까지 이어지는 야외극장 형태다.

교회는 1974년 9명의 신자로 시작해 지금은 7000명의 성도들이 주일예배를 드린다. 4명의 전임 사제를 비롯해 700명의 사역자들이 교회를 위해 일한다.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등의 교회와 함께 세미나, 콘퍼런스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2011년 11월 11일, 이집트 혁명 중에 개최했던 집회 이후 교파를 초월한 교회 연합운동의 모체가 되고 있다.

핍박 속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다

‘콥트(copt)’는 이집트를 뜻하는 말로 교회의 역사는 AD 60년 사도 마가의 선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막의 교부를 배출하고 초기 수도원운동을 이끌었다. 성 안토니는 대표적 수도사다. 7세기 이후 이집트가 이슬람화된 이후 지금까지 독특한 신앙 전통을 지키며 세계 교회의 한 분파로 자리하고 있다.

사만 사제에게 콥트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전 세계의 어머니 교회이며 1세기의 첫 교회”라고 말했다. 그는 사도행전 2장을 언급하면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에 이집트 사람(행 2:10)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9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CGI 개막식에서 잠시 울컥했다. 전 세계 69개국에서 참석한 2400여명의 대표들과 1만명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콥트교회를 위해 통성기도를 드린 것이다. 2011년 3월 이집트 혁명 이후 종교적 핍박을 당하고 있는 콥트교회와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한국 방문 소감을 묻자 “성령의 역사가 살아있다”고 말했다.

콥트교회는 혁명 이후 극렬한 핍박을 신앙으로 견디고 있다. 2011년 3월 9일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교회 신자 13명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고 135명이 부상했다. 성난 주민과 신자들도 맞섰고 그 와중에 무슬림도 부상당했다. 사만 사제는 이때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나 차별 없이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지난 6월 또 다시 소요가 발생해 교회가 불탔을 때는 이를 취재하던 이집트 신문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슬림형제단은 100여개의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 기관을 파괴했지만 진정한 교회인 신자공동체는 없애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집트를 살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이집트 안에서는 콥트교회의 사랑과 용서가 없었다면 내전으로 이어졌을 거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또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찾고 있다는 전언도 들린다. 사만 사제는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는 무슬림들을 돌보는 콥트교회 리더 중 한 명이다.

이사야 19장을 살다

사만 사제에 따르면 지금 콥트교회는 이사야 19장 말씀을 문자 그대로 살고 있다. 형제와 형제가, 이웃과 이웃이, 성읍과 성읍이, 왕권과 왕권이 서로 싸우고 있으며 폭군이 다스리고 있다(사 19:2∼4). 하지만 ‘그날’이 오면 만군의 주님이 팔을 펴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의 복이 될 것이다(사 19:16∼25). 그는 이 구절에 대해 “주님의 예언은 성취될 것”이라며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주일 외에도 목요일 예배를 드린다. 이 예배는 혁명 이후 교회 연합의 동력이 되고 있다. 콥트 교인뿐 아니라 이집트의 개신교회 성도들과 관심 있는 무슬림들도 참여하는 등 전국적 예배 모임으로 발전했고 병자가 낫는 기적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중동 지역의 기독교 위성TV인 SAT-7이 예배를 생중계한다. 그는 “우리는 하나의 그리스도와 하나의 성경을 믿으며 거룩의 시대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사만 사제는 국가적 소용돌이 속에 교인들이 핍박받고 있지만 고난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중 하나라고 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기이한 일의 연속

쓰레기마을은 사만 사제의 삶과 뗄 수 없는 곳이다. 카이로 시내의 쓰레기가 모두 모이는 이곳은 악취가 진동하지만 복음의 능력 역시 강한 곳이다. 72년 마을 주민 중 퀴디스 아기브 알 마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슈브라 지역에서 쓰레기를 수집했고 거기서 한 전도자를 만났다. 전도자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증거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다. 감동을 받은 퀴디스는 모카탐 쓰레기마을로 전도자를 초대해 2년간 주민을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전도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2년이 흘렀고 74년 2월 퀴디스는 또 다시 그 전도자에게 요청했다. 전도자는 그때 마음속에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전도자는 퀴디스에게 “거기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고 퀴디스는 “모카탐행 버스를 타고 와서 기다리면 자라이브까지 태워줄 또 다른 버스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갈등하던 그는 모카탐행 대신 정반대 방향의 마타리야행 버스를 탔다. 예언자 요나처럼 전도자는 괴로웠다. 그는 버스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다. “자라이브로 가라.” 가책을 받은 전도자는 결국 버스 종점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신을 초청했던 퀴디스가 거기서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전도자는 퀴디스와 만나 자라이브로 함께 오게 된다.

이 전도자가 바로 사만 사제다. 그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엄청난 주민들과 아이들, 쓰레기더미에 압도됐다”며 “하지만 내가 거기서 뭘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모카탐 언덕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밑 동굴을 발견했다. 사만 사제는 그곳이 기도하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고 3주간 매주 기도에 전념했다. 그리고 3주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기도하는 중 바람이 불더니 종이쓰레기 하나가 그들 앞에 떨어졌다.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18장이었다. 사제의 시선은 곧장 구절에 꽂혔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9, 10절)

사제는 이 말씀을 하늘의 확정 메시지로 여겼다. 그로부터 그는 마을 주민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사제가 되기 4년 전 일이었다. 사만 사제는 당시를 회상하며 “종이에 적힌 말씀을 보고 마음의 평안을 느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마을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일어났던 일 가운데 최고의 사건은 소망이 없던 쓰레기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교회 사역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76년 교회 건축 당시 물이 없어 건축이 중단됐을 때 대형 물탱크 트랙터 기사가 이를 제공하면서 해결됐고 이듬해에는 트랙터에서 놀던 6살짜리 소년이 떨어져 머리를 다쳤으나 교회의 기도로 치유를 받았다.

이 같은 배경 때문에 사만 사제는 현대 콥트교회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직제상 그는 지역 대표인 주교(bishop)와 교황 아래에 있지만 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스토리는 그의 존재감을 충분히 부각시키고도 남는다.

쓰레기마을은 69년 카이로시 당국이 시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넝마주이를 모카탐 언덕으로 이주시키면서 조성됐다. 이들은 여기서 집과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곳을 돼지우리, 현지어로는 ‘자라이브’로 부르며 비하했다. 영어로는 자발린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마을 주민 상당수가 크리스천이다.

87년까지 1만5000명까지 늘었고 지금은 6만명이 산다. 모든 주민은 개인 넝마 주머니를 갖고 있으며 카이로 전역을 다니며 재활용 가능한 병이나 플라스틱, 종이 등을 수집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집트 복음화를 꿈꾸다

사만 사제에게 기도제목을 물었다. “카이로가 주님의 도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6만명의 쓰레기마을 주민 모두가 주님께 오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카이로의 모든 가정과 직장에 이들이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기를 기도합니다.”

쓰레기마을 주민들은 부지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벽에 일어나 카이로 시내 쓰레기를 처리한다. 시민들에 따르면 이들은 일할 때 찬송을 부른다고 한다. 새벽기도를 알리는 아잔(이슬람 새벽기도) 소리보다 이들의 찬송이 카이로를 깨우는 것이다.

사만 사제는 쓰레기마을 주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정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간혹 쓰레기더미에서 엄청난 돈이 발견되는데 주민들은 이 돈을 갖지 않고 돌려줍니다. 한번은 무슬림 경찰이 자신이 잃었던 돈을 찾자 기독교인들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교회는 현재 방송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한 장비와 전문가를 찾고 있다. 한국교회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그는 부탁했다. 교회는 한국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한국예수전도단 소속 대학생 1500여명이 집회를 열었고 이집트 선교사들도 교회와 협력하면서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