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식물 최고의 복원지, 육군 교도소] 철창 안 수인들, 스러지는 우리꽃 피우다
입력 2013-10-19 04:58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풀 무더기를 한 평만 떼어다 교도소 운동장으로 옮겨놓을 수만 있다면….’
생태운동가 황대권(58)씨가 10년 전 펴냈던 ‘야생초 편지’에는 그가 안동교도소에 수감 중일 당시 사회참관을 나갔다가 주변에 무성한 야생초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며 탄식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권력에 의해 조작된 학원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3년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그가 교도소에서 그토록 꿈꿨던 일은 머지않아 현실이 됐다.
지난 17일 경기도 이천의 육군교도소. 이곳엔 군 간부 출신 및 1년6개월 미만의 형을 받은 사병 출신 기결수들이 수용돼 있다. 주변은 각급 부대가 둘러싸고 있어서 다른 부대를 거치지 않고는 교도소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차량은 트렁크를 열고 검색을 받는 등 이중삼중의 삼엄한 경계를 거쳐야 한다.
육군교도소 내로 들어가도 수련생(수감자들을 이렇게 부른다)들을 마주칠 일은 없다. 수련생들이 생활하는 수감시설은 5.2m 높이의 담으로 막혀 있다. 배수로도 철망으로 차단돼 있고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다. 수감시설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전자식 개폐장치가 설치된 육중한 철문을 지나는 것이다. 영화에서나 봤던 군 교도소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철문을 지나자 예상과 다른 모습과 맞닥뜨렸다. 왼쪽엔 지게차 등 중장비 기능시험장이 있었다. 낮고 낡은 건물엔 좁은 사무실 몇 개와 철제 침대를 만드는 작업장이 들어서 있었다. 용접이 한창 진행 중인 작업장을 통과하니 조그만 웅덩이 같은 습지와 비닐하우스 두 동이 눈에 들어왔다. 습지와 비닐하우스 곳곳에는 이름모를 식물이 가득했다.
“이건 전주물꼬리풀입니다. 멸종위기식물이지요. 습지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 두어 달 전 이곳에 습지를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전주물꼬리풀에 대해 설명하던 노태우(48) 육군교도소 기능교육과장은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더니 또 다른 멸종위기식물인 섬현삼과 왕제비꽃을 보여줬다. 노 과장은 “멸종위기식물 3종과 자생식물 9종 등 12종의 식물을 키우고 있다”며 “주위에 오염원이 전혀 없고 외부 유출도 불가능해 이곳이야말로 자생식물 복원에는 최적지”라고 강조했다.
비닐하우스를 빠져나와 언덕에 마련된 운동장으로 오르다보니 담벼락 아래에 여러 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울릉도 특산 식물이라는 해국과 벌개미취, 구절초 등이었다.
운동장에서는 수련생들이 공을 차고 있었고, 운동장 옆 담벼락 밑에서는 예닐곱 명의 수련생이 잡초를 뽑고 있었다. 수련생들이 입고 있는 하늘색 상하의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수련복과 ‘희망’이라는 글자, 그리고 곁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는 헌병을 보고서야 ‘아, 이곳이 식물원이 아니라 군 교도소였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김매기 작업을 하던 이규진(가명·22)씨는 “식물을 기르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꽃들이 더 잘 자라는 게 보인다”고 했다.
이씨는 출소 후 원예 자격증을 취득해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노 과장은 “관련 기관과 협의해 기능사 시험을 유치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는 이곳에서 중장비나 용접 등 외에도 원예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와 함께 잡초를 뽑던 김동민(가명·23)씨는 “할머니댁 옥상에 상추 등을 심고 길렀던 생각이 나서 원예 파트에 지원했다”며 “잡초를 뽑고 식물을 키우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보람도 느낀다”고 말했다. 김씨는 “내년 3월에 출소하는데 후임이 잘 기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라며 키우고 있는 식물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봄부터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수련생들을 진두지휘해 식물들을 길러온 곽영재(41) 교관은 “수련생들이 식물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을 볼 때면 피곤함이 사라진다”며 “수련생 교화에도 도움이 되고 국가적으로도 식물자원을 넓히는 효과가 크다고 하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전문기관 등으로부터 가장 모범적인 자생식물 복원 파트너로 평가받는 육군교도소였지만 고민은 있었다. “혹한기에 자생식물들을 보호하려면 비닐하우스 내 온도유지 설비가 필요할 것 같은데 예산 문제가 걸려 있다”며 운을 뗀 노 과장은 “무엇보다도 육군교도소에 원예교관 편제가 없는 게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원예교관 편제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실무를 이끌어왔던 곽 교관이 업무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어 사업 지속이 어렵다는 얘기다.
노 과장은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육군교도소에 이 사업을 유치했던 것처럼 노력하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느냐”며 “앞으로도 육군교도소는 자생식물 복원사업의 든든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활짝 웃었다.
철문을 지나 수감시설 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들어갈 땐 보이지 않았던 해국과 구절초 등이 도로 양쪽에서 주변의 야생초들과 어울려 자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5.2m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담장 안과 밖 모두에서 희망은 자라고 있었다.
이천=정승훈 기자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