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또 다른 망언
입력 2013-10-17 18:59
일본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책을 읽고 있는데 발밑에서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기차가 지나가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 겪는 지진. 온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반쯤 혼이 나가서는 동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 뒤로 규모 5∼6의 지진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점차 적응해 갔지만 처음 느낀 지진의 공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번은 헤드폰을 끼고 동네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다가 쓰나미 경고 방송을 못 들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제히 마을 쪽으로 나오고 있음에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모습들이었기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결국 인적 없는 바닷가 공원을 혼자 만끽하고 돌아오는 길에 경계경보 방송차량을 눈으로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후 2시에 내려졌던 쓰나미 경보가 오후 4시30분을 기해 해제됐음을 알려드립니다.” 확성기 소리에 다리가 풀려 가드레일을 붙잡고 장승처럼 서 있었던 그날의 기억. 지금도 악몽을 꿀 때 뜬금없이 재연되어 식은땀을 흘리게 한다.
사실 내 기억 속의 공포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지진과 쓰나미를 경험했다고 할 수도 없는,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생각과 말함에 있어서 작은 변화가 있었다. 함부로 천형이니 천벌이니 말하지 않는 것. 돌이켜보면 너무도 무감각하게 그 말을 썼다.
일본의 누군가가 독도를 두고 망언을 했을 때, 과거사를 뉘우치기는커녕 혐한의 깃발을 들고 나선 일본인들을 볼 때, 저러니 그런 무서운 재난을 당하지, 당해도 싸다고 함부로 말했다. 부끄럽게도 겪어보기 전까지는 스스로가 얼마나 비정하고 폭력적인지 느끼지 못했다.
며칠 전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 작가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해 한국 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분명 분개할 일이지만 상식선에서 사과 받고 학술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문제. 분노가 지나쳐 댓글과 트위터를 통해 떠도는 저주의 막말들은 보기에 불편했다. 1억2000만명의 목숨이 달렸건만 지진과 쓰나미로 가라앉아버리라니. 인간의 양심과 상식에 어긋나며 이성을 잃은 말이다.
일본의 역사왜곡만 망언이 아니다. 이 또한 망언이다. 홧김에라도 뿌려서는 안 될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 하지 않던가. 어떤 상황에서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이를 분별해서 말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