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표정을 실어나르는 트랜스포터

입력 2013-10-17 17:35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권혁웅 시집/창비

“작심하고 정색하고 싸느랗고 싶지 않았다. 세속이 그 지극한 경지 안에서 스스로를 들어 올렸으면 했다. 그러자 가족과 이웃들이 내 눈꺼풀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살았다.”(‘시인의 말’)

권혁웅(46)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창비)는 그 자신의 말대로 세속의 자리에서 촉발된 감각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 세속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있는 곳. 그곳을 세속이라고 할진대 권혁웅은 우선 세속의 장소에 필(feel)이 꽂힌다. 제목만 봐도 ‘도봉근린공원’ ‘주부노래교실’ ‘금영노래방에서 두 시간’ ‘불가마에서 두 시간’ ‘의정부 부대찌개집에서’ ‘춘천닭갈비집에서’ 등은 고스란히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장소이다.

“저기 수면을 끌어당기는 마흔 개의 빨대가 있다/ 들이친 비를 받아먹는 마흔 개의 입이 있다/ 벙벙한 어안(魚眼)은 한눈파는 법이 없어서/ 쉴 새 없이 오병이어를 쏟아낸다/ 음치가 음악치료가 되는 기적,/ 꽃미남과 함께하는 동대문구 주부노래교실”(‘주부노래교실’ 부분)

“누가 이 양떼를 연옥불에 던져 넣었나/ 수건을 둘둘 말아 머리에 인 어린 양과/ 불가마 속에서도 코를 고는 늙은 양들로 여기는 만원이다/ 올가을에는 기어코 성지순례를 가겠다고/ 삼 년째 돈을 붓는 아마곗돈 회원들,/ 종말을 팥빙수와 바꾸고 나자 어린아이 머리통 같은/ 구운 계란이 굴러온다”(‘불가마에서 두 시간’ 부분)

시집을 펼치면 익숙한 거리의 식당과 술집이 갈피마다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그것들은 대개 ‘∼방’ ‘∼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정하게 반겨주지만 그곳은 언제든 돌아가야 할 내 집이 아니라 두 시간 안팎으로 머물다 가는 길 위의 정거장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뜨끈한 음식을 앞에 두고 애인과 친구와 직장동료들이 수작을 한다. 세속의 속살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댓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중략)/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부분)

권혁웅은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일상과 희비극이 뒤섞인 보통사람들의 삶에 주목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서 거짓으로 “야근과 당직을 마치고 퇴근하는” 가장(‘24시 양평해장국’), “늙으면 죽어야지” 하면서도 “로맨스가 그치지 않는” 노인대학의 노인들(‘불멸’), 췌장암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간 사내(‘요단강 이야기’), 종이상자가 주소지인 노숙자들(‘삼국지 열전-노숙’)이야말로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세속은 기꺼이 우리 몸 안에도 있다.

“제국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긴 탁류가 하나 흐르니 이름을 요하(尿河)라 한다/ 5급수여서 먹을 수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직행버스가 요도를 오르내리는데/ 길이 좁고 낙석과 결석이 떨어져내려/ 늘 조마조마하다 끝에는 큰 폭포가 있어 서너 시간마다/ 튀는 물과 지린내로 장관을 이룬다”(‘몸속을 여행하는 법1’ 부분)

권혁웅은 말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말을 가지고 노는 말놀이 꾼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보고 들은 세속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트랜스포터가 권혁웅이다.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호구(糊口)’ 전문)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