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前 모던타임즈 탄생… 불안·광기를 먹고 자라나다
입력 2013-10-17 17:35
1913년 세기의 여름/플로리안 일리스/문학동네
“1913년, 사람들은 올해가 액년(厄年)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짓눌려 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한 친구에게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설교’를 선물하면서 헌정사에 붙이는 날짜에 예방차원에서 ‘1912+1’이라고 쓴다. 그리고 아르놀트 쇤베르크도 이 불길한 숫자에 마음을 졸이고 있다. 쇤베르크가 ‘12음 음악’을 고안한 것도 괜히 한 일이 아니다. 현대음악의 토대가 된 이 12음 음악은, 12 다음 숫자에 대한 공포에서 탄생했다. 미신에서 합리가 탄생한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예부 편집자 출신 작가 플로리안 일리스(42)가 쓴 ‘1913년 세기의 여름’(문학동네) 가운데 1913년 1월을 묘사한 글의 일부이다. 논픽션의 문체 미학을 한 차원 높이면서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 층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될 이 저작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3년 유럽 사회의 풍경을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나누어 그려나간다. 흔히 모더니티는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예술은 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전통과 단절을 선언했으며 문화사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20세기로 진입한 1913년에 모더니티는 이미 출발선을 떠났던 것이다.
날씨로 보면 1913년 여름은 끔찍했다. 빈의 8월 평균 기온은 16도였다. 1913년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몰랐으나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추운 8월이었다. 이상기후 속에서도 유럽의 문화는 독특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사진 연극 영화 패션 등 모든 문화 영역에서 예술가들은 사회적, 정신적 위기를 견디고 극복하며 모더니즘을 찬란하게 꽃피웠다. “카프카는 한 마리 개처럼 아버지 밑에서 고통 받고 있다. 아버지가 옆방에서 기침하거나 문을 너무 세게 닫을 때마다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직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스물두 살의 화가 에곤 실레는 1913년에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를 쓴다. 3월 31일에는 이런 편지를 쓴다. ‘저는 썩어서 영원한 생명을 남기는 열매가 될 거예요. 그러니 저를 낳은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1913년 3월)
그렇다. 1913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적 사건들, 성취들로 가득한 해였다. 문학에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3대 고전으로 꼽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탄생하고, 미술에서는 뉴욕에서 ‘아머리 쇼’가 현대미술의 빅뱅을 일으킨 가운데 베를린에서 12개국 90명의 화가들의 작품이 모인 ‘제1회 독일 가을 살롱전’이 열린다.
1913년은 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거부당하고 싸구려 수채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히틀러와 한 집의 손님방에 틀어박혀 민족 문제를 연구하던 스탈린이 빈의 쇤브룬 궁전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여러 번 마주쳤을지도 모르고, 프란츠 카프카와 제임스 조이스와 로베르트 무질이 트리에스테의 한 카페에 잠시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을지도 모르는 해이다. 또한 스탈린이 처음으로 트로츠키와 만난 1913년 2월에 바르셀로나에서는 훗날 스탈린의 명령으로 트로츠키를 살해하게 되는 라몬 메르카데르가 태어난다. 1913년 빈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으니, 20세기의 가장 지독한 폭군이자 독재자인 세 사람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던 셈이다. 이 저작의 소설적 재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러한 가정들에서 비롯되며 인물의 내면 묘사와 동시대 인물들을 1913년이라는 한 무대 위에 올려놓는 우연성의 포착이야말로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300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현대 유럽의 지성사와 문화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다.
저자는 1913년의 문을 이렇게 닫는다. “1913년 12월 31일. 슈니츨러는 일기에 몇 자 적는다. 오전에 ‘광기의 노벨레’를 우선 끝까지 받아쓰게 하다. 오후에는 리카르다 후흐의 ‘독일에서의 대전’을 읽는다. 그것 말고는 ‘하루 종일 아주 불안했다.’ 그러고 나서 저녁 모임이 있었다. ‘룰렛 게임을 했다.’ 자정이 되자 그들은 1914년을 위해 건배한다.” ‘하루 종일 불안’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힌다. 그건 1913년 전체의 공기가 불안했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모더니티가 등장했다는 말과 같다. 한경희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