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버버리와 애플

입력 2013-10-17 19:00

영국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중충한 날씨에 중절모와 버버리 코트 차림의 신사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학창시절 흑백영화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나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가 버버리 코트 깃을 멋지게 세우고 나와 여주인공의 허리를 끌어안을 때면 덩달아 가슴이 콩닥콩닥했던 기억도 새롭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해 처칠 총리,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도 버버리를 즐겨 입을 정도로 당시엔 ‘버버리를 입어줘야 패션의 완성’이었다. “영국이 낳은 것은 의회 민주주의와 스카치위스키, 버버리 코트다”라는 버버리 창업자 토머스 버버리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157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패션 브랜드 버버리에도 위기가 있었다. 1990년대 빠른 패션 흐름에 대응하지 못하고, 수많은 ‘바바리’ 짝퉁들이 넘쳐났다. 버버리를 구해낸 것은 1997년 CEO로 부임한 로즈마리 브라보다. 2001년에는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영입해 젊은 감성을 디자인하고 다양한 트렌치코트를 선보이며 부활을 알렸다.

2006년 7월 안젤라 아렌츠가 버버리 CEO로 취임한 뒤 첫 임원회의가 열렸다. 버버리를 입고 온 임원은 한 명도 없었다. 아렌츠는 “만드는 사람들조차 외면하는 브랜드를 누가 돈 내고 사 입겠는가”라며 브랜드 정체성 찾기에 나섰다. 그녀는 버버리 이미지로 굳어진 체크무늬에 덧붙여 기사가 깃발을 들고 말을 탄 문양과 창업자가 쓴 흘림체 버버리 로고를 사용했다. 명품 브랜드로선 처음으로 IT 기술과 결합을 시도해 뉴욕 파리 도쿄 등 5대 도시에서 3D로 패션쇼를 생중계하고 2009년엔 웹사이트 ‘아트 오브 더 트렌치’를 오픈해 소비자들이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진을 직접 올리도록 했다. 구닥다리 이미지의 버버리가 젊은 감각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되살아나면서 5년간 주가는 186% 올랐고, 매출은 배로 늘었다. 아렌츠는 2630만 달러(약 279억원) 연봉을 받아 영국 최고의 연봉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버버리를 떠나 내년부터 미국 IT 업체인 애플의 소매·온라인매장 총괄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아렌츠는 평소 구찌나 샤넬 등을 경쟁 브랜드로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며 유일하게 롤 브랜드로 생각하는 모델이 있다면 애플이라고 해왔다. 애플은 지난 7월엔 프랑스 패션회사 입생로랑의 폴 데네브 전 CEO를 영입했다. 스티브 잡스 사망 이후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애플이 재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