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경기침체 그늘… ‘反EU 깃발’ 극우정당 세력화
입력 2013-10-16 18:40 수정 2013-10-16 22:44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리 르 펜 대표는 4월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네덜란드 극우정당인 자유당(PVV)의 헤이르트 빌더스 대표와 마주앉았다. 약진 중인 유럽 내 극우정당의 거물급 지도자 간 만남이었으니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두 시간여 이뤄진 식사의 메인코스는 ‘반(反) 유럽연합(EU)’. 둘은 말이 잘 통했고 첫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내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유럽 정치판을 흔들겠다는 것이다.
◇반EU 세력 득세하나=르 펜 대표는 11월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AFP통신이 15일(현지시간) 전했다. 그의 방문은 빌더스 대표의 초청에 따른 것으로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두 정당의 공조를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극우정당의 결집은 르 펜과 빌더스의 친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국 핀란드 헝가리 덴마크 스웨덴 등의 반 EU 극우정당들까지 가세하고 있다.
극우의 세력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EU의 각종 통합정책을 옹호해 온 기득권 세력이다. EU의 입법기관 격인 유럽의회는 28개 EU 회원국 시민들이 5년에 한 번씩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의회에 진출한 정당이 주도적으로 입법하긴 어렵지만 많은 정책 영역에서 수정 요구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EU 연설에서 극우의 세력화를 우려하며 결속을 호소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유럽통합 반대를 외치는 각국 극우정당의 득세가 요즘 유럽 정치권의 대세다. EU 기득권 세력조차 내년 선거에서 반EU 세력이 30%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유럽의회에서 한 자릿수 비중으로 소수정당에 불과한 반EU 세력이 5년 새 급부상하고 있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럽의 경기침체 탓이 크다. 좌파 집권 하에서 경기회복은 요원하고, 실업률은 악화일로다. 이 와중에 유럽통합이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극우정당의 반유로화, 반이민정책이 먹히는 이유다.
◇애국주의자끼리 연대가 가능할까=하지만 애국주의를 기치로 한 극우정당 간 연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내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유럽주의자들끼리 연대하더라도 ‘자국민이 최우선’이라는 논리로 무장한 이들이 EU 정책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극우세력화의 최대 아이러니다. 프랑스의 한 정치 전문가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별 기반을 굳힌 극우정당이 유럽의회에 대거 진출하면 오히려 EU의 경제위기 극복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극우정당 간 세력화가 유럽 전체 정치판을 흔들긴 어렵고, 그 영향이 본국으로 돌아가 자국의 보수화를 부채질할 거란 관측이 나온다. 유럽 외교관들은 “유럽의회는 중도 우파, 중도 좌파 두 정치세력이 오랫동안 주도했기 때문에 극우정당이 세력화하더라도 당장 EU의 정책을 바꾸진 못할 것”이라며 “그보다 영향력 확대로 자국 내 집권당을 압박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컨대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극우정당인 영국독립당(UKip)의 반이민정책 등 유럽통합에 거스르는 정책 반영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네덜란드도 상황이 비슷하다. 빌더스 대표의 입김이 커지면서 마크 루트 총리 역시 유럽통합 정책에 대한 선회 압박을 받고 있다. 결국 이런 흐름으로 인해 EU 통합정책이 유럽에서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될 거란 분석도 나온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