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고난 속에서 그린 가장 한국적인 예수… 서울미술관서 운보 김기창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입력 2013-10-16 18:21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화가 운보(雲甫) 김기창(1914∼2001·사진). 물레를 돌리다 수태고지를 받는 마리아, 갓을 쓰고 산상수훈하는 예수, 한옥에서 최후만찬을 하는 제자들,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십자가 진 예수를 보는 아낙네….

운보의 ‘예수의 생애’ 연작이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17일부터 운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예수와 귀먹은 양’이라는 제목으로 예수 연작 30점을 비롯해 주요 작품 60여점을 전시한다. 예수의 생애는 2002년 덕수궁미술관 추모전 이후 11년 만의 전시다.

운보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전북 군산 근처 시골로 피난 갔다. 아내 우향(雨鄕) 박내현(1920∼76)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지하 무덤으로 내려갔다. 차마 놓고 올라올 수가 없어 다시 안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몹시 통곡을 했는데 누군가 흔들어 잠에서 깼다.”

운보는 이 꿈을 꾼 후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향은 “남편은 자나 깨나 모든 괴로움을 성경에 묻어가며 성화 구성에 나날을 보냈다. 불안과 슬픔 속에서도 조용히 성화의 줄거리를 묵상했다”고 회고했다. 예수의 생애는 신앙의 연장이었다.

평소 친분 있던 미국인 선교사 앤더스 젠슨은 “예수는 어느 한 나라를 위해서 탄생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류의 구세주다. 많은 나라가 믿음을 갖기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자기들의 모습을 본떠 성화를 그렸다. 당신도 한국의 성화를 완성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운보는 선교사의 조언대로 전 인류의 구세주 예수의 면모에 한국의 풍속이 접목된 ‘한국적인 성화’를 그려 나갔다.

당시 운보는 4달러짜리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꾸렸다. 암울한 시기 그는 성화 30점을 완성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뿌리내린 것을 보여주는 그림들이었다.

운보는 7세 때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다. 운보의 어머니 한윤명 여사는 장남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한 여사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자였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아들이 그림에 소질을 보이자 1930년 17세 때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의 문하생으로 보냈다.

이당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사제는 모두 서울 안국동 안국교회에 출석했다. 운보는 “이당 선생님은 일요일 예배를 보러 오실 때마다 그림을 봐주셨다”고 회고했다.

운보는 화단 입문 반 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평면적인 한국화를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예순이 넘어서는 청록 산수에 민화를 접목했다. 과장과 해학이 돋보이는 ‘바보 산수’를 발표, 대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운보는 평생 침묵 속에서 붓으로 하나님을 고백했다. 그가 남긴 작품은 4000점에 이른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다(02-395-0100).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