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⑮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입력 2013-10-16 17:28 수정 2013-10-16 14:31
“분단 극복은 교회의 과제” 남북관계 희망의 끈 이어와
1960∼70년대 군사독재 시기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강하게 열망했다.
당시 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가장 큰 명분은 남북 분단 상황이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민주화를 위해서는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1년 6월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제4차 한·독 교회협의회가 열렸다.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이 주제였다. 참석자들은 공동결의문을 채택하고, 분단된 국가의 통일이 교회의 과제라는 데 합의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통일 문제를 의논할 위원회나 연구소를 만들 것을 권유했다. NCCK는 이듬해 2월 제31차 총회에서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 신설을 결의했다. 정부는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를 허가할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83년 3월과 5월 NCCK는 통일문제협의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이 역시 정부의 방해로 무산됐다. NCCK는 성명을 내고 “우리는 한국 교회가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염원과 갈망에 호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라고 믿는다”고 천명했다.
정권의 탄압에 가로막혔던 평화통일 운동은 해외 교회가 참여하면서 돌파구가 열렸다.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문제위원회(CCIA)는 동북아 지역과 전 세계의 긴장완화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가 필요함을 알리기 위해 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열었다. 아시아와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20개국에서 온 교회지도자들은 도잔소 선언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해치는 분단을 극복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남북 교회 간 만남과 대화가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세계교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도잔소 회의 이후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와 손잡고 지속적으로 통일운동을 실천해 갔다. 85년 11월 WCC 대표단이 북한을 처음 방문했고, 이듬해 4월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단 10명도 북한과 남한을 방문했다.
86년 9월 CCIA는 스위스 글리온에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단 4명, NCCK 대표단 6명이 초청됐다. 분단 이후 남북한 기독교인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CCIA 실무간사였던 에리히 바인개르트너는 참관기에서 “참석자들은 체제상 많은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성만찬을 나누며 평화통일의 필요성과 민족애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88년 2월 NCCK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88선언)을 채택했다. 88선언은 통일문제협의회를 통해 3년여에 걸쳐 350여명의 회원교단 대표자들이 머리를 맞대 만든 작품이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 정책적 입장이 담겼다. 88선언은 통일을 위한 민간기구의 활동 보장과 남북한 경제 및 학술 예술 종교의 교류 등 구체적 통일 과제를 제시했다. 같은 해 4월 인천에서 열린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 참석자들은 88선언에 동의하면서 유엔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남북 군사훈련 중지와 핵무기 제거를 평화통일을 위한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88년 11월 제2차 글리온 회의에서 남북한 교회는 광복 50년을 맞는 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매년 광복절 직전 주일을 공동기도일로 지키기로 합의했다. 90년 12월 제3차 글리온 회의에서 남북 교회는 다시 만났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3차 글리온회의에서 남북 교회는 평화와 통일교육을 실시하고, 상호 방문, 남북 당국 간 상호 불가침선언 채택 및 군사훈련 중지 촉구 등 9개 항에 달하는 ‘희년 5개년 공동작업계획’을 합의하는 등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희년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93년 남북인간띠잇기대회로 이어졌다. 그해 8월 15일 임진각에서 독립문까지 48㎞ 구간에서 열린 행사에 6만여명의 시민과 성도들이 참여했다. 95년 8월 15일 발표된 희년선언에는 남북한 신뢰와 평화구축 및 바람직한 통일을 위한 원칙, 희년정신 실천을 위한 교회의 과제 등이 제시됐다. 이 교수는 “90년대 초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사회에 부각되면서 희년선언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남북교회가 만남을 거듭하고, 신뢰를 쌓으면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실천한 것은 민족통일운동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라며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통일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