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민족분단에 침묵하고 통일운동 외면했다” 회개

입력 2013-10-16 17:28 수정 2013-10-16 21:05


NCCK 88선언 의미와 과제

88선언은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에서 열린 NCCK 제37회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으로 선포됐다.

당시 통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형태(연동교회 원로) 목사가 낭독자로 나서 “한국 교회는 민족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했고,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 통일운동의 흐름도 외면했다”며 “북에 적개심을 품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죄를 지었으며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했다”고 회개했다. 낭독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만장일치로 88선언을 채택했다.

88선언은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의 고백 외에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7·4공동성명의 3대 정신의 재확인과 함께 정부에 이산가족 상봉, 통일을 위한 민간기구 활동 보장, 남북한 경제 및 학술, 예술, 종교의 교류 등을 요구했다. 또 한반도 비핵화와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는 평화협정 체결과 불가침조약 체결을 촉구했다. 88선언 발표 직후 보수 교단을 중심으로 주한 미군과 핵무기 철수 및 군축문제를 언급한 것 등에 대해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만열 교수는 “반대여론도 있었지만 88선언은 최초의 민간 통일선언으로 한국 통일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88년 7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자주와 평화, 민주 복지의 원칙에 입각해 민족의 자존과 통일 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갈 것임을 약속한다’며 발표한 7·7특별선언은 88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91년 12월 남북 사이에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도 상호존중과 비방금지, 비핵화, 학술교류 등 88선언에서 요구한 내용들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88선언은 대북 지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교회는 88선언이 담고 있는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창구로 대북 지원을 시작했고, 민간이 통일운동에 동참하면서 현재까지 각 종교단체와 비정부기구(NGO)는 북한에 쌀과 염소를 보내고, 빵공장과 국수공장을 설립하는 등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이사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