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수’ 명함보고 전화했더니… 음란 전단지 교묘한 진화
입력 2013-10-16 05:29
야구, 바나나, 복숭아, 수면실…. 연관이 없는 듯한 이 단어들은 ‘음침한’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음란 업소’를 암시하는 데 사용된다.
지난달 28일 서울 북창동을 걷던 직장인 이모(29)씨는 정장 차림의 남성에게 명함을 건네받았다. 명함에는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택’(사진)이란 문구와 함께 ‘***** 스포츠’라 적혀 있었고, 미국 메이저리그 추신수 선수의 사진이 함께 인쇄돼 있었다.
이씨는 며칠 뒤 야구 글러브를 사려고 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추신수 대표’는 대뜸 “몇 명이냐”고 물었다. 어리둥절한 이씨가 무슨 말인지 되묻자 그 남성은 “이곳은 인원수별로 여성을 연결해준다. 2차는 안 되고 옷 벗고 유사성행위 해주는 ‘하드코어’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명함 속 ‘야구 전문점’은 야구 용품점으로 위장한 불법 유흥업소였다.
최근 음란 전단 단속이 강화되자 유흥업소와 성매매 업소들이 이처럼 업종을 알 수 없는 변종 전단을 제작해 뿌리고 있다. 야구는 네티즌들이 ‘야동’(야한 동영상)을 ‘야구 동영상’이란 말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면서 음란물을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바나나와 복숭아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잠을 자는 공간인 수면실은 퇴폐·음란 행위를 하는 장소란 의미로 변질됐다. 이런 단어로도 유흥업소임을 알아차리는 ‘선수’들만 겨냥해 일종의 ‘암호’ 전단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11일 오후 11시 서울 방화동의 한 거리에는 바나나와 복숭아 사진이 담긴 전단이 수북했다. 전단을 뿌리던 30대 남성은 “요즘 누가 직접적인 단어로 홍보하느냐”며 “알 만한 사람만 아는 단어로 홍보해야 손님도 잡고 단속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 주변에서도 10분 새 각기 다른 업체의 ‘암호’ 전단 10여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아이돌’ ‘24시 영업’ ‘수면실’ 등 단어 하나와 업체명만 적혀 있는 게 대부분이다.
변종 전단이 활개를 치면서 단속 실적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올 1∼8월 음란 전단 단속 건수는 537건, 처벌 인원은 611명에 그쳤다. 경찰은 이달 초 통신사와 협의해 음란 전단에 적힌 전화번호를 즉시 차단하는 조치까지 내놨다. 그러자 ‘임대가상이동통신망’ 전화번호를 성매매 전단에 적는 이들도 등장했다. 이런 전화번호는 통신 3사의 관리를 받지 않아 추적이 어렵다. 서울 강남구는 15일 가상이동통신망 전화번호로 성매매 전단을 배포한 불법업소 16곳을 적발했다.
김유나 박요진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