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글로벌 선사는 앞서가고 中 후발업체는 따라붙고… 길 잃은 해운산업

입력 2013-10-16 05:35


우리나라 10대 수출품목 중 5위를 차지하고 있는 해운업이 위기에 빠졌다. 우리나라는 1960년 세계 100위권 해운국에 불과했지만 고속성장을 거듭하면서 그리스, 일본, 중국, 독일에 이어 세계 5위 해운대국에 올라섰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길고 긴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3년 가까이 이어지는 해운경기 침체에 국내 1∼2위 업체는 만성 적자로 신음하고 있다. 해외 해운회사들이 서로 제휴를 맺고 덩치를 키우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중국 등 후발주자들은 거세게 치고 올라온다.

◇‘넛 크래커(nut-cracker)’에 끼인 호두 신세=1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해운업계 1위인 한진해운, 2위인 현대상선은 2011년부터 극심한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한진해운은 2011년 8239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기록한 뒤 올 상반기까지 흑자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현대상선도 마찬가지다. 2011년 5343억원, 지난해 9886억원, 올 상반기 1243억원 등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한진해운은 글로벌 7위, 현대상선은 17위다.

전문가들은 현재 세계경기 회복세 등을 감안할 때 해운업 경기가 바닥을 치고 조금씩 반등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전달되는 ‘온기’는 해운업체 사이에서 윗목과 아랫목이 다르다. 세계 1위인 덴마크의 머스크(Maersk)는 지난해 5억2500만 달러 영업이익을 내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난 2분기 영업이익률을 7%까지 끌어올리는 등 차츰 실적이 좋아지고 있다. 세계 2위인 스위스의 MSC, 3위인 프랑스의 CMA-CGM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원인은 원가경쟁력에 있다. 글로벌 상위 업체들은 선박 대형화, 높은 연료 효율성, 우수한 글로벌 네트워크 등을 바탕으로 막강한 경쟁력을 갖췄다. 최근에는 1∼3위 업체가 해운동맹인 ‘P3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나섰다.

‘P3 네트워크’는 내년 봄부터 공동 운항에 나선다. 세계 29개 항로에 총 선복량(적재능력) 260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에 달하는 선박 255척을 투입할 예정이다. 전 세계 해운 물동량의 40%에 이르는 규모다. 시장점유율이 높은 이들이 공동 운항에 나서면 나머지 해운업체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현대상선은 세계 최대 해운동맹인 ‘G6’(선박 50척 보유), 한진해운은 CKYH얼라이언스에 소속돼 있어 직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등 후발주자의 추격도 국내 해운업체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코스코, 차이나시핑 등 자국 해운업체에 95억 달러씩 지원하고 물동량을 독점적으로 밀어주며 해운업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해운업 좌초 위기인데 손놓은 정부=국내 해운업계의 체력이 고갈되고 있지만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경쟁국과 대조적이다. 우리 정부는 장기 자금지원 등을 유보한 채 제한적인 유동성 지원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머스크나 CMA-CGM, 코스코 등은 금융위기 이후 정부로부터 대규모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우리 정부는 선박금융기금 및 해운보증기금 설립, 회사채 신속인수 등을 검토하고 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선박금융기금은 사실상 무산됐고, 해운보증기금은 연내 설립이 어려운 형편이다. 회사채 신속인수는 지원 자격이 까다로워 중소 해운업체에는 ‘그림의 떡’이다.

한국선주협회 관계자는 “국내 해운회사는 회사채 상환 등 빚 갚기에 급급해 장기적으로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친환경·고효율의 신형 선박을 주문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다”며 “긴 보릿고개를 버틴다 하더라도 이미 경쟁력을 상실해 국내 해운산업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