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이기웅 파주출판단지 이사장·열화당 대표

입력 2013-10-15 17:13


“책은 귀하게 찍어야… 출판사는 돈 아닌 가치를 만드는 곳”

태풍 다나스의 간접 영향으로 가을비가 흩뿌리던 지난 8일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열화당 사무실에서 이기웅(73)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가 명함을 건넸다. 처음 보는 폴더형 명함이다. 첫 장에는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이사장, 다음 장에는 열화당 대표 직함이 적혀 있다.

그렇다.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도 그는 출판단지 이사장으로, 열화당 대표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하는 내내 그에게서 느꼈던 열정과 에너지가 1인 2역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인 듯했다. 사무실도 인상적이다. 1층은 책 박물관으로 꾸며졌고, 3층 집무실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책을 벗 삼아 평생을 살아온 그의 역정(歷程)이 오롯이 담겨 있다. 책과 더불어 눈길을 사로잡은 또 하나는 사무실 곳곳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였다.

4시간 가까이 이어진 만남에서 그는 두 개의 정신과 네 가지의 가치를 강조했다. ‘안중근 정신’과 ‘선교장 정신’ 그리고 균형, 절제, 조화, 인간애(사랑)이다.

-책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책을 내면 무서워요. 응보가 오거든요. 책은 귀하게 찍어야 해요. 저는 부수를 계속 줄여왔어요.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죠. 저자들이 처음에 이해 못했을 때는 반대도 했지만 그 참뜻을 이해했죠. 거기에는 내용도 귀하게 써야 한다는 암시가 들어 있어요. 책을 함부로 내지 말고 숙성시켜서 내야 해요. 종이책의 위기가 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먹이사슬의 위기가 아니라 책 자체의 위기예요. 책을 너무 남용하고, 속이고, 베끼고…. 경고는 오래전에 왔죠. 요즘은 양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전자 미디어 흉내 내다 보면 종이 미디어는 설 곳이 없어요. 전자책에 맡길 건 빨리 맡겨야 해요. 다만 종이로 건져야 하는 것, 전자책이 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들만 종이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영역 분담이 이뤄져야 하는 거죠.”

-책의 세계로 이끈 계기가 있었습니까.

“선교장에서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책더미 속에서 자랐어요. 어른들이 책 심부름도 많이 시켰고요. 책 심부름이 책과 인연을 맺게 해준 거죠. 남들이 이기웅이란 사람은 이미 선교장에서 다 배웠다고들 해요. 책처럼 귀한 것이 없어요. 선교장에서 책도 만들었어요. 열화당은 사랑채라고 하기엔 규모가 크죠. 유명인사들의 집회장소이기도 했고, 도서관이기도 했고, 출판사이기도 했죠. 요즘으로 치면 문화센터였던 셈이죠.”

-열화당은 미술·예술서적 전문 출판사입니다. 시쳇말로 돈 안 되는 책인데 출판사 운영에 어려움이 많을 걸로 생각되는데요.

“가치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 틀린 거고요. 출판사는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가치를 만드는 곳이죠. 돈이 좀 들어오기도 하지만 가치가 우선이죠. 전 기록의 가치, 정보의 가치를 먼저 생각해요. 책을 안 사는 사회가 문제이지 책 자체가 문제는 아니죠. 그런 점에서 한창기(전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1997년 작고) 선생은 저의 모델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출판의 생각, 문화의 생각을 닮았으면 합니다. 그를 닮는 것이 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봐요. 기록해야 될 것만 새기면서 부지런히 장사하려 애쓰죠. 왜냐하면 지속가능하게 해야 하니까요. 먹고사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도 될 수가 없어요.”

-파주출판도시 기획과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는데 파주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선 땅값이 싸야 했고, 구상을 펼 수 있는 (땅의) 크기와 위치가 맞아야 했죠. 참 방황 많이 했습니다. 수도권에 위치하지 않으면, 수도권의 젖줄을 놓치면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사람을 구할 수가 있나요. 저자가 오나요. 사업자가 오나요. 서울을 적당하게 외면하면서도 접근할 수 있는 거리여야 했어요. 일종의 서울 탈출인데 가까우면 서울에 먹혀버리죠. 먹히지 않을 거리, 서울이라는 젖줄을 놓치지 않을 거리로 첨엔 일산을 생각했는데 땅값이 엄청났어요. 파주는 2차였어요. 아무도 접근하지 않으려는 버려진 땅이었죠. 자유로를 믿었죠. 그 꿈을 갖고 밀어붙인 거예요.”

-다른 나라에도 출판도시 같은 게 있나요.

“파주출판도시 같은 책 클러스터는 없어요. 여기는 생산도시이기 때문에 배송, 분류, 인쇄 등의 기능을 모두 갖춘 게 성공의 요체라고 생각해요. 어렵지만 서점과 지방독자, 지방문화를 만족시키려면 모든 걸 갖추는 게 필요했죠. 그렇게 되면 꿈은 이루어질 거라 믿은 거죠. 출판도시는 통일을 향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에 제2의 출판도시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출판은 개성공단에 들어갈 수 없는 품목이었어요. 여기 와서 분단의 아픔을 많이 느꼈습니다. 제게 제일 시끄러운 소음은 남북이 싸우는 소리예요. 여기 뒤쪽이 인쇄소인데, 인쇄소 소음은 견디겠는데 남북이 싸우는 소음은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언론이 남북의 싸움 좀 말려주세요.”

-2단계 사업으로 책에 영상(영화)을 접목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어떤 사업인가요.

“한마디로 책과 영화의 도시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책과 영화의 도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잖았죠.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별들의 고향’은 다 책에서 시작된 거죠. 전혀 원작과 달리하는 것도 있지만 책의 영향을 받아 피어난 게 영화예요. ‘책에서 피어난 꽃, 영화’ 포스터전을 연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물론 아닌 것도 있지만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게 세계적 추세입니다. 책의 도시는 영화를 탄생시키는 베이스를 갖고 있어요. 책만 있다면 도시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궁극의 목표는 북팜(Book farm)시티 건설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틀림없는 말이에요. 농사는 꼭 농사만 말하는 게 아니고 사람 농사도 포함하는 거예요. 책의 도시도 농사의 개념을 잊으면 안 돼요. 재래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향약정신이 우리 도시의 중요한 개념입니다. 중국에서 출판도시를 벤치마킹하고 싶다고 해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는데 껍데기를 베끼지 말고, 알맹이를 베끼라고 했어요. 우선 100만평을 시범단지로 정했어요. 팜 시티 건설은 제2의 새마을운동 같은 거예요. 출판도시를 만든 경험 등을 토대로 사회에 공여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드는 거죠. 이것이 농업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죠. 이 도시에 책 농사, 사람 농사를 같이 가져가자는 거예요. 기왕에 있는 마을을 거점마을로 재조정해서 거기에 문화적 요소를 충분히 세우는 거죠. 농사도 지으면서 도시보다 많은 문화를 향수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 농사가 돼요. 책 도시는 여러 개 만들 수 없지만 팜 시티는 여러 개 만들 수 있어요. 박근혜 대통령께도 이미 제안했는데 아직 안 되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출판도시 만들 때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어떤 의미입니까. ‘세상의 어린이들’이라는 이기웅 사진집도 내지 않았습니까.

“‘벌거벗은 임금님’은 우리의 잠언이에요.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고 던진 어린이의 말은 정직함을 얘기해요. 이 도시가 거짓과 관계없길 바랐어요. 어린이에게 위험한 도시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 이상 무슨 모델이 있겠어요. 근데 순식간에 이런 모토가 어린이 책 팔아먹기 위한 상술로 매도되기도 했죠. 그땐 어찌나 화가 나든지….”

-박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파주 북소리 2013’ 축제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문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했는데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십니까.

“제가 초청한 거예요. 여기 오셔서 인쇄공도 만나고 편집자와도 대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이 막았는지 어쨌는지 한 사람도 안 보고 그냥 갔어요. 제가 몇 가지 진언을 했지요. 역대 대통령들이 많이 애쓰셨다고 했죠. 군이 파주출판도시 건설에 동의를 하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그걸 해결해줬고, 김대중정부도 지원을 많이 했다고 말이죠. 우리나라가 활자와 인쇄 종주국이라고 하는데 관련 박물관 하나 없어요. 박 대통령에게 이거 하나 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문화융성이 박근혜정부 국정지표의 하나인데요.

“문화 자체를 이해해야 문화를 융성시키는 비밀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도시의 4대 개념이 절제, 균형, 조화, 인간애예요. 문화는 절제에서 나오죠. 그런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를 얘기할 때는 특정한 걸 두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성 때문에 그러겠지만 문화가 융성하려면 모든 부분에 문화들이 골고루 스며들어야 해요. 문화가 기초를 이루지 않은 어떤 장르도 성립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자꾸 작은 의미의 문화만 강조해요. 문화가 보이지 않으니까 애매하게 접근하는 거예요. 문화는 무엇이냐. 인문학이고, 교양이고, 역사의식이에요. 이런 것들이 고루 갖춰져야 해요. 문화를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니 딴 데는 문화가 없는 거예요. 어느 특정분야가 잘되면 문화가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거죠. 문화는 독자적으로 융성하는 게 아니에요. 온 나라가 융성해야 문화도 융성하는 거예요. 경제, 군사, 체육 그런 것들이 문화와 더불어 융성하는 것이지 문화가 다른 걸 끌어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문화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해요. 문화는 구체적 사례보다 총체를 의미하는 거라고 봅니다.”

사무실 여기저기에 ‘모셔져 있는’ 안 의사가 궁금했다. 그는 그가 옮겨 쓴 책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를 건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중근 정신은 ‘신독(愼獨)’이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간다(戒愼乎其所不睹)’는 그 정신이 파주출판도시에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이기웅은

강릉 선교장(船橋莊)을 떼어 놓고 이기웅 열화당 대표를 말할 수 없다. 선교장은 그를 책의 세계로 이끌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어머니 자궁 같은 곳이다. 그는 선교장에서 태어나 고교시절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효령대군 11세손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이 세운 아흔아홉 칸 선교장엔 고서와 시화가 많았다. 장마가 물러가면 책을 햇볕에 말리는 일도, 어른들의 책 심부름도 그의 몫이었다. 퀴퀴하기만 하던 책 곰팡이 냄새는 언제부턴가 친숙한 내음이 되어 다가왔고, 책은 어느새 그의 평생 벗이 되었다.

그가 1971년 설립한 출판사 ‘열화당(悅話堂)’도 선교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의 5대조 오은(鰲隱) 이후(李厚)가 순조 15년(1815년) 선교장 안에 지은 사랑채가 열화당이다. 열화당은 손님을 맞는 단순한 사랑채가 아니었다. 장서를 보관하고, 문집과 족보를 인쇄하는 도서관이자 문화센터였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친척들의 정다운 얘기에 즐거워한다)”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책을 소중히 여겼던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이라고 지었다.

선교장과 함께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다른 존재가 파주출판도시다. 그는 허허벌판에 출판도시를 입안하고, 설계하고, 건설한 선구자다. 파주출판도시 건설은 2010년 1단계 사업이 끝났고, 현재 책에 영상을 접목한 2단계 ‘책과 영화의 도시’ 조성사업이 2015년 완공을 목표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여기에 농업이 보태져 파주출판도시는 ‘북팜(Book farm) 시티’로 완성된다.

파주출판도시는 외국에서도 인정한 ‘히트 상품’이다. 이 대표는 2012년 파주출판도시를 ‘공동성의 실천’에 기반한 인간 중심의 도시로 가꾼 점을 높이 평가받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국부 셰이크 자이예드를 기려 제정한 ‘셰이크 자이예드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는 파주출판도시 발전을 위해 2억원이 넘는 상금을 기꺼이 내놓았다. 그는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4), ‘제10회 한국가톨릭매스컴상’(2000), ‘올해의 출판인 공로상’(2002) ‘간행물윤리상 특별상’(2004), ‘제28회 한국건축가협회상 특별상’(2005), ‘인촌상’ ‘제48회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상’(이상 2006), ‘21세기대상 특별상’(2013. 4)을 수상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제27회 책의 날을 맞아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가 수여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