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이곳을 마을이라 부른다
입력 2013-10-15 18:30
7년 전 경기도 파주로 이사 오면서 이곳에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떠나는 삶은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던 시절에는 내가 머무르는 곳에 애정을 두기가 힘들었다. 정착의 마음이 들고부터 나는 이웃과 동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마을 잔치를 열었다. 벼룩시장을 열어 옷이며 책, 장난감을 아이들이 직접 싼 값에 사고팔았다. 딸은 동네 언니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았고 딸의 옷도 동네 동생들의 차지가 됐다. 남의 옷을 물려받는다는 것이 전혀 흉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우며 자랑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쓰던 물건이 고물로 처리되지 않고 의미 있게 순환되는 과정은 나와 아이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벼룩시장이 끝나면 이웃들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지난봄에는 ‘햇살담소’라는 시간이 마련됐다. ‘세바시’나 ‘TED’랑 비슷하지만 동네 주민이 강연자로 나서는 것이 핵심이다.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앞집 남자가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화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거다. 간혹 마주치는 집채만 한 큰 개 세 마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치유견인지도, 덩치 좋은 그 총각이 건강한 유통구조를 꿈꾸는 프랜차이즈 떡볶이 사업가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지난주 열린 두 번째 햇살담소에는 단지 내 피아노 선생님이 음악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알비노니와 베토벤의 음악을 함께 들었다. 자녀 교육 걱정으로 이곳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해 민경 엄마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진학 상담을 해주었다.
동네 빵집 주인아저씨의 이야기도 잊을 수 없다. “우리 막내 보시면 꼭 밥 먹었느냐고 물어봐줘요. 밥 먹었다고 대답해도 안 먹은 것 같이 보이거든 데려다 밥 좀 먹여주세요.” 그의 어머니가 동네사람들에게 늘 하셨다던 말씀처럼 그 막내는 빵집 앞을 서성이는 아이가 있으면 꼭 밥 먹었냐고 묻고 빵을 쥐어주는 빵집 아저씨가 되어 우리 앞에 있었다.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없도록 빵 봉사도 열심히 하신다. 아저씨가 가져오신 빵을 뜯어먹으며 좋은 사람이 만든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실감했다. 맛있는 빵 고르는 방법은 다음에 가게에 오면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니 식빵 사러 가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길어질지 모른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곳. 이곳을 우리는 마을이라고 부른다.
김용신(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