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문화예술 실핏줄 역할 ‘쿤스트페어라인’
입력 2013-10-13 19:14
베를린 남서쪽 반제(Wannsee) 지역의 한적한 주택가. 지난달 11일 이곳에 위치한 개인 화랑 ‘무터 푸라제(Mutter Fourage)’를 찾았다. 마침 중견 여성 화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허브 등 꽃들이 만발한 마당을 가운데 두고 갤러리와 소규모 공연장, 레스토랑, 커피숍이 ㄷ자 형태로 빙 둘러 있었다. 100석 정도의 객석을 갖춘 같은 이름의 소공연장에선 시 낭송, 연극, 연주회 등이 열린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갤러리와 공연장을 후원하는 120명 회원의 동호회 ‘친구들 클럽’(Verein der Freunde)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은 독일 문화예술의 실핏줄, ‘쿤스트페어라인(Kunstverein)’의 전형적 사례다. 쿤스트페어라인은 영어로 번역하면 ‘예술협회(art association)’쯤 된다. 하지만 예술후원 동호회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다. 말하자면 개인들의 예술 후원, ‘개인 메세나’라 할 수 있다.
‘친구들’의 연회비는 80유로(약 11만7000원). 따라서 총 후원금은 연간 총 9600유로(약 1400만원)에 달한다. 문화공간 무터 푸라제의 볼프강 이멘하우젠 대표는 “그 돈으로 전시나 공연 브로셔 제작과 발송 등 홍보에 쓰거나 공연에 필요한 의자, 스피커 등 집기를 사기도 한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결성된 건 22년 전. 그는 가내사업이었던 말 먹이용 사료(fourage) 공장을 물려받았는데 사양산업이 되면서 1978년 폐업하고 이런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품의 주인공 ‘억척어멈(Mutter Courage)’을 패러디한 ‘무터 푸라제’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형편이 나빠져 문을 닫을 위기에 빠졌다. 그때 동네 사람과 지인들이 팔을 걷고 나서줬다. 처음 8명으로 시작했던 ‘친구들’은 이제 회원 100명이 넘는 후원 동호회로 성장했다.
하지만 회원들이 큰 혜택을 받는 건 아니다. 공연이 있을 경우 15유로 남짓 입장료를 20% 할인받는 정도. 그런데도 활동이 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들’ 회원 중 한 명인 로즈메리 자마르는 “이곳은 우리 지역 문화쉼터 노릇을 한다. 이게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며 “특이할 것도 없는, 독일에선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 사람이 여러 개 쿤스트페어라인에 가입한 경우가 흔하다.
이멘하우젠 대표가 그 예다. 그 역시 ‘리버만 게젤샤프트’ 등 미술을 후원하는 4개의 쿤스트페어라인에 가입해 있다. 지역 출신인 독일의 인상주의 화가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1842∼1935)을 후원하는 ‘리버만 게젤샤프트’는 회원이 1500명이나 된다. 연간 50유로씩 전체 회원으로부터 거두는 총 7만5000유로(약 1억900만원)의 수입은 리버만 생가를 개조한 미술관 운영에 지원된다. 쿤스트페어라인은 베를린에만 1만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멘하우젠 대표는 “우리나라에선 예술 생산을 시장논리에만 맡기지 않고 국가가 지원하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1, 2차 대전 후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개인 후원자들이 나서게 된 것”이라고 했다.
백기영 경기문화재단 수석학예사는 “쿤스트페어라인은 예술 소비자들이 향유만 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일에 제 돈을 들여 창조에도 기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런 시민 이니셔티브는 상업적 때가 덜 묻은 독일 예술을 만드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지원이 문화의 동맥이라면 쿤스트페어라인은 문화의 실핏줄인 셈이다.
반제(베를린)=글·사진 손영옥 문화생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