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필교] 그리움 담은 엽서 한 장

입력 2013-10-13 17:40


청명한 가을날 오후, 북 멘토(book mentor)의 초대로 양화진 책방에 들렀다. 입구에 예쁜 그림엽서가 전시되어 있어 둘러보고 있는데, 30대 중반쯤의 여성이 말을 걸어온다. “이 엽서는 노부부가 새벽기도를 가는 그림인데 인기가 있고요, 이 엽서는 보자기를 주제로 만든 작품인데 참 아름답지요.” 엽서를 직접 제작하게 된 동기와 엽서마다 깃든 사연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그이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열정을 느꼈다.

취미로 27년간 엽서를 수집해 왔다는 그이의 엽서 사랑은 마니아를 넘어선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홀로서기’ 시와 그림이 있는 엽서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데, 지금까지 모은 엽서가 수천 장이라고 한다. 앨범을 펼치니 ‘구소련에서 미국으로 보낸 엽서, 이스라엘 엽서, 1900년대 초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소인이 찍힌 희귀한 엽서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여행지에서 발품을 팔아 헌책방을 뒤져 수집한 엽서가 꽤 많다. 그 열정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2년 전에는 서울시 후원으로 엽서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엽서 크기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보통 240원짜리 우표를 붙여 보내면 2∼3일 후에 도착해요. 정갈한 손 글씨가 담긴 엽서를 받았을 때의 감흥은 긴 여운을 남기지요. 저는 책을 읽다가 발견한 인상 깊은 구절을 메모해 두었다가 가끔 엽서에 실어 보내기도 해요.” 그이는 내년쯤 엽서가게를 열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입양, 강제징용, 이민 등으로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묵동화를 펴내고 싶다는 꿈을 내비쳤다.

무엇이든 빠른 게 좋다고 외치는 스피드 시대에 한 장의 엽서가 주는 ‘느림의 행복’을 차분히 일깨워 주는 그이의 이야기를 들으니 분주하게 사느라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마침 그날 만난 북 멘토와의 인연도 26년 전 그림엽서를 받으면서 시작된지라, 세 사람이 함께 만난 책방의 그 공간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가을편지)라는 노랫말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휴대폰과 메일의 등장으로 기다림의 시간이 짧아짐에 따라 기다림으로 생기는 그리움의 밀도가 좀 옅어진 듯하다. 그리움의 준말이 그림이고, 그림의 준말이 글이라던가. 그리움을 담아 ‘잎사귀에 쓰는 글’이 엽서(葉書)라는데,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보고 싶은 이에게 그리움을 담은 엽서 한 장 띄워 볼까.

윤필교(기록문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