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선교사 자녀들이 이제 선교사가 되어
입력 2013-10-13 17:16 수정 2013-10-13 21:03
초등학교만 4개국 9개학교… 아빠 사역지로 이끌려 고생한 아이 주님 일꾼으로 잘자라 감사
선교단체를 통해 남부 아프리카의 보츠와나로 파송받았지만 당시 그 나라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어 케냐의 장로교 선교부에서 먼저 훈련을 받고 정보를 얻은 후 선교지로 갔습니다. 한국을 떠나 보츠와나에서 안정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은 부족한 젊은 아빠와 엄마인 초년병 선교사들의 손에 이끌려(?) 언어, 음식, 기후 심지어는 친구들까지도 생소한 땅에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됐습니다.
자녀들은 단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아빠가 사역을 위해 이리로 가면 따라서 학교를 옮겨야 하고 아빠가 몸이 아파 어디론가 움직이면 또다시 학교를 전학해야 했습니다. 그간 학교를 옮길 때마다 적응하기 위해 겪었던 마음고생도 많았을 겁니다.
동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 가만히 세어 보니 동현이는 보츠와나,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등 4개국에서 9개 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명현이는 3개국 5개 학교를 다녔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력은 남다르게 뛰어날지 모르지만 학기가 잘 안 맞으면 집에 있는 날도 많아 학업을 성실하게 이어가기는 어려웠습니다.
선교사가 한국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자녀가 결혼식을 할 때 청첩장을 보내거나 축의금을 받는 것은 생략하는 게 맞는다고 여겼습니다. 더욱이 선교사 자녀가 선교사로 살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9년 12월 동현이와 한나의 결혼식을 남아공에서 했습니다. 가진 것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 결혼에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10년 4월 초 석영이와 명현이의 결혼식은 한국에서 했습니다.
이때 생각이 하나 더 보태졌습니다.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결혼식은 같이 삶을 살며 동역하는 흑인 친구들의 결혼식 형편에 비춰 부끄럽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 사람들은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식을 제대로 올리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자녀의 결혼식을 간소하게 치렀습니다. 하지만 은혜와 감사는 컸습니다. 저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오신 몇몇 분들은 선교비를 손에 쥐어주고 가셨습니다.
어느 날, 종려나무를 바라보다 문득 이 친구들이 10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쓰임을 받았던 종려나무 가지처럼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 때에 어느 구석에서라도 꼭 어떤 모양으로든 그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10대를 잘 보내고 20대부터 사역(사역이란 꼭 선교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 주님 안에서 무엇을 하든 그분의 영광을 위하는 것)을 해서 30년간 잘 사역을 한 후, 50대가 되면 은퇴를 하고 그 이후에는 너희들의 자녀들이 주님 앞에서 잘 사역을 하도록 지켜보는 것, 그것이 은퇴 이후의 중한 사역이라고 여기기를….”
그렇게 기도했는데 이 자리에 같이 있습니다.
사역철학
선교의 어느 현장이나 분명 힘들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아프리카 땅 한쪽에 살면서 부족한 게 많은 이 젊은 친구들이 또다시 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역철학’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아프리카를 위로하라’는 말씀을 사역과 삶의 중심에 품으면서 다음의 몇 가지를 사역의 기준처럼 갖도록 당부했습니다.
우선 사역의 초점은 남아공 러스텐버그 지역의 언어인 세츠와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맞추고 이들 흑인들로 하여금 같은 피부색을 가진 아프리카 영혼들을 위로하고 돕도록 하는 데 있다.
사역의 명분은 한국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의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잘 세우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심방한다. 사역의 자세는 만물의 찌꺼기와 때처럼 취급을 받는다 해도 복음이 전해진다면 기뻐하며 행여 작은 희생과 불편함이 있다 해도 이 사역의 대상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함이 있다면 기꺼이 이 삶을 산다. 선교사의 역할은 바울 사도가 주님을 만나 눈이 멀어 있을 때 그를 안수하고 눈을 뜨게 한 후 사도행전의 기록 속에서 다시 보이지 않았던 아나니아의 역할처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잘 섬기는 것이다.
선교사의 목회는 직접 목회와 간접 목회를 구분해서 교회를 시작하고 최소 5년 이상은 선교사들이 직접 흑인 팀과 함께 목회해야 한다. 개척한 교회가 성장의 열매를 거둘 때면 선교사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선교사의 희망은 이 흑인 친구들 자체에 있으며 이들에게 찬송과 수학 그리고 태권도를 가르치며 빵 한 끼를 같이 나누고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일과 함께 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놓고 기도하는 일에 기쁨을 느껴야 한다. 누가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묻거든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무엇이 진정한 복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 그분만이 진정한 복”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낮의 찬란한 해처럼 밤의 영롱한 별처럼
이제 50대 후반을 훌쩍 지났습니다. 젊었을 때 50대가 되면 은퇴하겠다고 했는데 벌써 그때가 다된 셈입니다. 수년간 한솥밥을 먹고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가는 흑인들을 바라보며 가슴 저림을 자녀들과 함께 맛봤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예배실이든 창고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졌을 때 당혹감도 같이 느꼈습니다. 밤중에 사이렌이 울리면 깊은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기들을 다독이며 순찰하는 남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총을 든 강도를 당하는 현장에도 같이 있었어야 했던 이 젊은 친구들이 이 자리에 같이 있습니다. 선교사의 이름을 이마에 같이 붙이고 그것을 인생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인 줄로 알고….
오랜 친구 하나가 어느 날 제게 “자식들은 넓은 세상으로 보내지”라고 했습니다. 수년이 지나서는 “이제 왜 이 자녀들이 이 자리에 있는지 이해하겠다”고 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 젊은 친구들을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하나만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는 사역을 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들도 속히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소원하는 사람들로, 주님 오실 때까지 그 자녀들의 세대가 거듭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의 형제자매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래전에 백인 인도인 중국인 등도 이 땅에 와서 수세대를 거듭하며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미국 등에서 세대를 거듭해서 살아가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처럼, 이들도 이 땅에서 삶을 불편해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에선 이름을 알리지 못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의 찬란한 해처럼 밤의 영롱한 별처럼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으며 인생을 보내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 조성수 선교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소속 선교사, GP선교회 협력선교사
△1956년생. 84년 성결대 신학과 졸업
△87년부터 5년간 보츠와나에서 사역
△95년부터 ‘월간 한국인 선교사’ 편집인
△99년부터 남아공 루스텐버그에서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