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 (28) 소나기 지원으로 일군 문화 르네상스
입력 2013-10-13 18:18
예술 ‘나래’ 맘껏 펼칠 창작공간 값싸게 제공
‘베를린에는 세 부류가 있다. 실직자, 연금수령자, 그리고 예술가가 그들이다.’
독일 수도 베를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그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정책과 더불어 예술가 지원 정책이 잘 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독일에서 외교·국방·경제·환경 등 전반적 대내외 정책은 연방정부가 관장하지만 문화정책은 각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베를린 주정부는 물론 통일 수도 베를린을 예술의 도시로 키워나가기 위해 연방 정부도 지원을 아끼지 않기에 베를린은 전체 독일의 문화정책 방향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각국 예술가들을 흡인하는 베를린의 문화예술지원책을 소개한다.
◇“문예기관은 문화의 등대”…집중 지원=연간 문화 관련 예산은 약 4억 유로(약 5800억원). 이는 미국 전체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예산의 두 배를 넘는 것이라고 한다. 베를린의 전체 문화·예술 분야 지원액의 95%는 오페라하우스와 극장, 오케스트라, 박물관, 기념관, 도서관 등 정부가 관장하는 문예기관에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베를린 주정부는 이들 기관을 문화의 빛을 비춘다는 뜻에서 ‘등대’에 비유한다. 세계 각지 예술가들이 이를 보고 베를린의 품으로 찾아오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역으로 이들 기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베를린필 등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예술기관들의 입장료 수입 의존도를 낮춤으로써 상업성의 유혹에서 벗어나 수준 높은 예술 생산 활동을 하도록 만드는 토대가 된다.
실제로 세계적 명망을 얻고 있는 이들 문예기관은 각국 예술 소비자들을 끌어당기는 자석 역할을 하고 있다. 투자가 선순환 효과를 낳으면서 문화관광 수요도 증대하고 있다. 베를린 주정부에 따르면 베를린을 찾는 연 9백만명의 관광객 가운데 3분의 2가 베를린필이나 오페라, 미술관 관람 등 문화를 즐기고 있다.
◇예술가에게도 소나기 지원 =무용가, 연극배우, 화가 등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마음껏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작업 공간이다. 베를린은 이런 의욕을 북돋우고 있다. 뉴욕이나 런던 등에 비해 물가 자체도 싸지만 스튜디오 임대 지원책 등을 통해 창작공간을 아주 저렴하게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정부에서 매년 112만7000유로를 대고 전업시각예술가협회(BBK=Berufsverband Bildender Kunstler)가 운영을 맡은 ‘스튜디오 리스 프로그램’은 화가, 비디오아티스트 등 시각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약 800곳의 스튜디오나 아파트가 저렴한 월세로 공급되는데 임대 기간은 8년으로 제한된다. 베를린으로 몰리는 예술가들이 넘쳐나면서 작업 공간은 폭증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각 장르에 걸쳐 예술프로젝트에 대해 주는 ‘프로젝트 파이낸싱’(2000만 유로)도 활기를 띠고 있다. 2009년의 경우 1434건의 신청 중 320건에 혜택이 돌아갔다. 신예를 지원하는 ‘스타트 업 프로그램’도 있다.
◇국적, 성별 차별이 없는 지원=현대 사회는 자유분방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갖춰야 한다는 게 정부의 정책 철학이다. 그래서 국적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애쓴다.
독일아카데미교환서비스(DAAD)가 운영하는 ‘베를린거주예술가지원프로그램’은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있다. 20건의 장학금을 거주 기간 1년 정도의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에게 지원한다. ‘우먼아티스트프로그램’은 여성에게, ‘지적프로젝트프로그램’은 모든 분야에 걸쳐 외국인 신예작가들에게 제공된다.
베를린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은 지원기간이 끝나도 눌러앉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예술도시 베를린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윈윈이 된다고 정부는 강조한다.
정책 담당자들은 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문화적 색깔을 풍성하게 하는 자산이라고 여기며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정부 집계에 따르면 문화예술기금 신청자의 25%, 기금 수령자의 31%가 외국인이다.
◇싼 물가·도시 역사·유산 자체도 매력=통일 수도가 되어서인지 베를린은 파리, 런던 등 다른 메트로폴리탄뿐 아니라 독일 내에서도 뮌헨이나 함부르크 등 옛 서독의 대도시에 비해 집세나 물가가 싼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국제도시를 찾아 근거지를 옮기기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그 자체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프라인 것이다.
유서 깊은 건축물이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 활동의 결과물이 산재한 것도 영감과 자극을 필요로 하는 예술가들을 손짓한다. 베를린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3개나 된다. 건축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서민용 주택단지, 포츠담의 프로이센 제국 시절 궁정과 궁원들, 현대미술관 디자인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건축물이 모여 있는 박물관섬이다.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베를린필, 베를린국립발레 등의 문예기관, 창의적인 예술가 커뮤니티, 저명한 작가들과 예술 조직 등도 전 세계 예술가들을 끌어당긴다.
베를린=손영옥 문화생활부장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