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설지원] 희망이라는 편지에 사랑이라는 우표 한장 붙여 주세요

입력 2013-10-11 17:34


희귀난치병 어린이돕는 전도용 잡지 ‘편지’ 설지원 팀장

손바닥만한 책자 ‘편지’가 있다. 좌절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에게 꿈과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도서출판 토기장이(대표 임용수)가 매월 1만5000부를 찍어 병원, 학교, 교도소, 군부대 등에 무료 배포하는 전도용 잡지다. 2000년 10월 처음 나왔다. 32쪽짜리 ‘편지’는 탐나는 책자가 아니다. 어쩌다 손에 들려지더라도 표지를 넘기기 전에 버려질 것 같은 심심한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 ‘편지’가 13년째 많은 이들의 손에 들려지고 있다. 1년 구독료 1만원을 내고 두 부씩 받아보는 이도 있다. 교회나 단체 등에선 한 부당 200원씩 지불하고 50부, 500부씩 가져가기도 한다. 미국에도 250부를 보낸다. 심심한 ‘편지’에 무슨 담백한 사연이 있는 걸까.

2006년 12월부터 토기장이는 희귀난치성질환으로 고통 받는 저소득 아동·청소년을 섬기는 ‘희망옹달샘’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편지’에 희망옹달샘 코너를 만들어 몸이 아파 힘들어하는 어린이들의 사연을 실었다. 이들을 돕는 후원자들도 소개했다. 그렇게 희망옹달샘 이야기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전도용 ‘편지’가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메신저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중심에 설지원(35) 팀장이 있다. 그가 하는 일은 희귀난치성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취재해 ‘편지’에 소개하는 것. 또 후원금 관리와 전달, 후원자와의 1대1 연결, 중보기도 등이다. 그는 이 일을 통해 만난 이들을 ‘희망옹달샘 가족’이라고 불렀다. 지난 2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어린이병동에서 설 팀장과 ‘희망옹달샘 가족’을 만났다.

희망옹달샘 이야기, 하나

전예지(10)양은 설 팀장을 ‘토끼샘’이라 불렀다. 식빵에 잼을 발라 ‘예지표 샌드위치’를 만들어 대접할 정도로 토끼샘을 좋아한다. 예지는 음식을 먹어도 소화, 흡수가 안 되는 ‘가성 장폐색’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잦은 구토로 탈수 증세를 보여도 물조차 마실 수 없다. 엄마 장혜란(37)씨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오히려 예지가 더 불쌍하다고 한다”며 “그런데도 우리 딸은 늘 밝고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픈 아이 같지 않다. 주변에 몰려드는 어린 환우들에게 구슬 팔찌를 선물하면서 오히려 “우리 씩씩하게 견디자”고 파이팅을 외친다. 예지의 소망은 한 번만이라도 교회에 가서 실컷 찬송을 불러보는 것. 긍정의 에너지를 곳곳에 퍼뜨리는 예지는 하나님의 어린 천사였다.

갑작스런 페이스메이커(심장의 박동을 정상으로 유지하는 장치) 이상으로 이번 달 안에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곽원(10)군은 예지 친구다. 어린 조카 원이와 단둘이 사는 고모 곽혜란(61)씨는 예지 엄마가 부쩍 힘들어할 때 옆에서 벗이 돼 줬다. 곽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원이 엄마, 중국에서 일하는 아이 아빠를 대신해 10년 넘게 홀로 원이를 돌보고 있다. 조카지만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혼자였으면 외로울 인생, 원이 덕에 잊지 못할 추억도 생겼다. 생후 한 달 만에 자신의 간을 이식받고서야 겨우 목숨을 건진 원이. “우리 아기가 살았다”며 안도의 숨을 내쉰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또 지난해 생각지도 않게 받은 ‘환갑상’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8월 23일에 ‘형들’(자원봉사팀) 네 명이 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나 너무 서글픈데 우연찮게 내 생일 날 형들이 왔네. 그것도 환갑인데’라고 말했거든요. 갑자기 형들이 후다닥 나가더니 케이크랑 잔뜩 먹을 것을 들고 오더라고요. 생일상 받은 거 처음이었어요. 너무 좋아 잊지 못해요.”

원이는 장기기형 외 41가지 희귀난치성질환을 갖고 있다. 매일 병원을 방문해 주사약을 처방받아 12시간씩 주사를 맞아야 한다. 약까지 타러 올 땐, 원이도 챙겨야지,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런 사연을 듣고 형들이 나타난 것이다. 지난해 2월호 ‘편지’에 희망옹달샘 주인공으로 원이가 소개된 뒤 서울 응암동 평강교회 청년부 봉사팀 ‘제이핸즈’가 설 팀장에게 연락했다. 곽씨는 이들 청년을 ‘형들’이라고 불렀다.

형들은 정기적으로 집을 방문해 원이와 놀아주고, 곽씨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병원에 들러 소형차 한 가득 원이 약을 받아오는 것도 형들이 해줬다. “1년 넘게 우리를 도와줬는데…. 가족이 하지 못하는 그 일을 믿음 안에서 청년들이 해준 겁니다.” 곽씨는 원이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아이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하루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소망을 내비쳤다. “내가 간직한 추억의 기쁨을 우리 원이에게도 남겨주고 싶어요.”

예지와 원이가 함들지만 희망을 키울 수 있는 건 토끼샘과 ‘형들’ 같은 희망옹달샘 후원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편지’ 사역과 희망옹달샘 캠페인 첫 시작 때부터 함께해 온 설 팀장은 틈틈이 어린이병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준다. 아직 미혼의 그는 아픈 어린이들의 마음을 잘 읽어준다. 하지만 처음 캠페인을 시작하고 ‘편지’에 소개할 주인공을 찾을 땐 그도 막막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할까 고민했지요. 많이 아파보이게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야 후원금도 더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목적을 후원에 두지 말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 두자’고 말입니다.”

그의 마음이 통한 걸까. 그렇게 신뢰를 갖고 어린 환우와 가족을 만났을 때 기적의 열매들이 곳곳에 맺혔다. 원이와 고모를 도와준 형들처럼 말이다.

희망옹달샘 이야기, 둘

희망옹달샘 두 번째 주인공 김혜성(14)군의 엄마 반옥남(44)씨는 9일 전화통화에서 “지금 우리 가족이 천국에서 살고 있다”며 웃었다. 2007년 1월호 ‘편지’에 소개됐을 때 혜성이는 순적혈구 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아이 아빠까지 가출한 상황에서 엄마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 혜성이는 수술 성공 확률 5%의 희망 속에서 골수이식을 받았고 지금도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다.

“그때는 수면제 없이 잠도 못 잤을 정도입니다. 아이 장례식도 치를 형편이 못돼 수술 전에 시체 기증도 서약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희망옹달샘을 만난 이후 힘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같이 기도해주는 설쌤에게 참 고마워요.”

받고만 있을 수 없었던 반씨는 혜성이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희망옹달샘 3호 주인공으로 나온 현우라는 아이에게 100만원을 후원했다. 반씨에게 그 돈은 정말 컸다. 그런데 이 사랑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 걸까. 나눔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편지’를 통해 혜성이 엄마의 후원 이야기를 본 한 기업체 사장이 100만원을 혜성이 엄마에게 또 후원한 것이다. 설 팀장은 “가난한 자의 돈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따뜻한 희망소식이었다”고 회상했다. 혜성이 건강을 위해 지난해 전북 진안으로 이사한 반씨는 ‘편지’를 갖고 전도하는 것은 물론, 인근 독거노인들을 섬기며 아이가 받은 사랑을 같이 나누고 있다.

희망옹달샘 이야기, 셋

‘편지’ 사역을 하는 설 팀장은 희망옹달샘 가족들의 편지를 많이 받는다. 2009년 9월 19일에 받은 한 통의 편지 얘기다. “부산에 사는 수아 엄마입니다. 8월에 희망옹달샘 희승이 기사를 보고 마음에 부담이 와서, 얼마 되지 않지만 수아를 위해 모아둔 100만원을 헌금할까 합니다. 시어른, 친정식구들이 수아 낳을 때 주신 돈과 여러 어른들이 옷 한 벌 사주라고 주신 돈을 지금까지 모은 것입니다.”

사업을 하던 한 남자는 갑자기 재정상태가 어려워져 극약을 먹고야 말았다. 깨어나 보니 교도소였다. 가족도 모두 잃고 삶의 희망이 없던 그에게 어느 날 ‘편지’가 손에 들려졌다. 거기에서 성호의 사연을 읽었다면서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다. “뭔가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에 후원금을 보냅니다. 절대로 나쁜 돈 아니니 좋은 일에 써주셨으면 합니다.”

250원짜리 우표 40장이 들어 있는 한 통의 편지도 받았다. 역시 발신 주소는 교도소. “누군가의 손길로 시작된 ‘편지’가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희망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동참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이 샘솟는 ‘희망옹달샘’

‘편지’에서 ‘단비의 열매’ 코너를 집필 중인 원의숙(미국 얼바인침례교회) 집사는 신앙 간증집 ‘내 안에 심겨진 가시나무’를 출간하고 책 수익금 전액을 희망옹달샘에 전달했다. “딸의 치료를 위해 마지막 금팔찌를 팔아야겠다”는 ‘편지’ 내용을 보고 자신의 패물들을 팔아 후원금으로 보내준 한 중년의 여성, 뇌사 상태인 어머니가 받는 연금을 모아 어머니 이름으로 후원금을 보내는 아들, 남편에게 받은 용돈 전부를 후원금으로 떼놓은 한 주부, 자신이 받은 후원금의 10분의 1을 다시 ‘희망옹달샘’으로 돌려보내는 어린 환우 가족들…. 이렇게 ‘편지’는 아프고 힘든 이웃들에게 기도와 물질이라는 희망을 실어 날랐다. 지금까지 희망옹달샘은 매월 한 가정씩 83가정을 ‘편지’에 소개해 섬겼고 2억2530여만원을 후원했다.

희망옹달샘 가족은 살어름판을 걷는 심정이다. 매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 팀장은 “갑작스럽게 아이들과 이별할 때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희망옹달샘 가족을 ‘편지’에 실어 세상에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다는 설 팀장은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지원의 폭도 커졌으면 한다”고 바랐다.

“백혈병은 진단을 받으면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희귀난치성질환의 경우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질병이 아니면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게다가 치료방법이나 약이 없다보니 가족들의 가슴은 더욱 타들어가고요.”

예지가 그런 경우다. 정확한 병명이 없어 비슷한 ‘가성 장폐색’ 진단을 받은 것이다. 한 달에 약 값만 400여만원.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설 팀장은 “이들은 수술을 한다고 해서, 약을 먹는다고 해서 낫는 게 아니기 때문에 평생 그 질환과 합병증으로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며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