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디지털과 손글씨
입력 2013-10-11 17:52
며칠 전 중학교에 다니는 작은애의 중간고사 정오표가 나왔다. 그런데 만점이라고 했던 영어에서 한 문제가 틀린 것으로 표시돼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이 쓴 알파벳 ‘C’가 선생님 눈에는 ‘2’로 보여 감점 처리됐다며 억울해했다. 시험지를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선생님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애의 악필은 나한테도 몇 차례나 지적을 당하곤 했기 때문이다.
요즘 악필 때문에 고생하는 애들이 많은 이유는 손글씨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엔 선생님들이 요점을 프린트물로 나눠주고, 어쩌다 해가는 수행평가도 컴퓨터로 작성해 제출한다. 친구들과 주고받는 쪽지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다 보니 손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다.
컴퓨터 자판에 더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손글씨를 쓰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인다. 초등학생들이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글씨를 직접 쓰기 싫어서라고 하며, 대학생들조차 손글씨로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한다. 대다수 학부모들이 자녀가 취학 전에 한글을 깨치도록 가르치지만 올바른 글쓰기를 지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럼 손글씨와 컴퓨터 자판 중 작문에 유리한 필기법은 무엇일까. 작문 발달과 작문 장애를 연구하는 미국 워싱턴주립대 버지니아 버닝거 교수는 실제로 이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200여명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펜과 컴퓨터 자판을 이용해 주어진 주제로 10분 동안 에세이를 쓰게 한 것. 그 결과 대부분의 아이들은 컴퓨터 자판보다 펜을 이용해 손글씨를 쓸 때 더 빨리, 더 긴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디애나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손글씨를 쓸 경우 컴퓨터 자판으로 문장을 작성할 때보다 뇌의 활성화가 잘 되어 자신이 쓴 내용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손글씨의 감소 추세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대다수 학교에서는 부모 세대가 사용했던 영어 필기체 글쓰기 교육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으며, 필기체로 쓴 글씨는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조차 있다고 한다. 또한 지난해 영국의 한 인쇄 업체가 실시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국인의 3분의 1은 자신이 직접 쓴 손글씨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
디지털(Digital)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디지투스(digitus)’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 손글씨가 사라져가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