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금 내면 TV맛집 소개” 8억 알겨내
입력 2013-10-10 18:14
서울 도곡동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윤모(40)씨는 지난해 10월 한 케이블방송 맛집 프로그램 외주제작업체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40만원을 내면 음식점을 케이블방송에 맛집으로 출연시켜 준다는 제의였다.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책을 기부하기 때문에 연말 소득공제도 가능하다고 했다. 크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윤씨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녀들의 초등학교에 기부된 책은 단가 1400원짜리 자기계발서 150권이었다. 학교 측은 책의 외양과 내용 모두 학생들이 볼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해 도서관이 아닌 창고에 이를 보관했다. 240만원을 받은 업체 대표가 21만원어치 ‘떨이 판매용’ 책을 넘겨주곤 나머지를 가로챈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는 모교 등에 책을 기부하면 케이블방송 맛집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다고 속여 음식점 업주들로부터 총 8억749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사기)로 케이블방송 외주제작업체 대표 김모(32)씨를 구속했다고 10일 밝혔다.
김씨는 지난해 5월부터 지난 8월까지 케이블방송 맛집 소개 프로그램인 ‘맛의 달인’을 연출했다. 이 프로그램은 매주 1회 45분간 8개 음식점을 소개했고 모두 479개 음식점이 방송에 나왔다. 김씨는 이들 중 일부로부터 각각 160만∼25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음식점 업주들에게는 “정부가 지정한 권장도서를 모교에 기부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더 이상 출판되지 않는 재고도서 등을 헐값에 구입해 학교 측에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업주들에게 받은 돈의 10%만을 도서 구입비로 사용했다. 챙긴 돈의 절반은 아파트 매입 대금과 결혼자금, 외제차 및 명품시계 구입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또 2011년 8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김씨로부터 “방송에 편성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청탁과 함께 44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케이블방송사 전 편성제작국장 임모(43)씨와 전 편성팀장 홍모(40)씨도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프로그램 인지도가 낮아 방송제작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 김씨가 ‘도서 기부’라는 꼼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사건을 통해 일부 케이블방송사가 방송에 내보내주는 대가로 외주업체로부터 돈을 받는 관행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박요진 기자 tru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