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피크 카
입력 2013-10-10 17:42
현대인의 행동습관 가운데 다른 동물이나 외계인이 보기에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이 많을 것이다. 개인 승용차 보유성향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루에 1시간 남짓 사용하기 위해 1t짜리 애물단지를 나머지 시간 내내 주차공간에 보관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다.
지금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자동차 정점(Peak Car) 이론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다. 자동차정점은 석유 생산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시점을 뜻하는 피크 오일(석유 정점)처럼 자동차 이용이나 생산이 한계점에 이르는 때를 일컫는다. 외신들에 따르면 1인당 자동차 주행거리가 적어도 8개 선진국(미국 영국 호주 독일 프랑스 아이슬란드 일본 스웨덴)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6월말 한 리서치 회사의 자료를 인용, “미국 내 주행거리 집계 수치가 2005년 정점을 찍고서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며 “2013년 4월까지 약 9% 가까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이는 1995년 1월 수치와 비슷한 수준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미국의 자동차문화가 저물고 있다고까지 지적했다.
그 원인으로는 우선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의 급격한 확대가 손꼽힌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덕분에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자주 연락할 수 있는데 굳이 만나려고 운전할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도시의 확장과 자동차 이용을 조장했던 연방 및 주 정책이 약화됐거나 역전됐다. 잇따른 도심 재개발로 교외지역이 위축되면서 통근거리가 줄어들었다. 자동차 지옥으로 악명 높았던 뉴욕시는 공용 자전거 프로그램과 자전거 전용도로 확대, 교량 및 터널 통행료의 대폭 인상 등을 통해 자동차 주행거리를 대폭 줄였다.
젊은이들의 운전 기피현상도 두드러진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서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데 왜 운전에 시간을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1983년만 해도 미국의 16세 연령 인구의 46%가 운전면허를 갖고 있었지만, 2010년에는 28%만 보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 정부는 여전히 자동차 중심의 국토 및 도시개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주행거리가 줄지 않고, 보유대수도 급증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고속도로, 도심 외곽도로 등 자동차 관련 인프라를 계속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정부 재정이 악화됐는데도 제2경부, 제2서해안 고속도로를 포기하지 않고 민자를 유치해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역시 ‘우물안 개구리’의 대응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