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뒷북 신용평가 언제까지 할 건가

입력 2013-10-10 17:41


“기업이 신용평가사에 객관적 자료 넘기는 걸 의무화하고 따르지 않으면 강제해야”

국제 신용평가사(신평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국가 기업 금융기관을 가리지 않고 신용등급을 매긴다. 대표적 신평사로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피치가 꼽힌다. 이들의 평가는 가히 절대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국제 신평사들은 유럽 각국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다.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 국채 가격이 떨어지고 금리가 급등하는 등 경제 전반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후폭풍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실핏줄처럼 얽힌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한다. 신용등급이 강등된 국가나 기업이 항의하지만 국제 신평사들의 평가 잣대가 오락가락했다는 뉴스를 접해보지 못했다. 오로지 투자자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엄정한 잣대를 적용한다.

S&P는 초우량 국가 미국에도 메스를 들이댔다. 2011년 8월 부채한도 논란이 불거지자 미국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에서 한 단계 낮췄다. 이 여파로 각국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졌다. 한국도 주가가 폭락하는 된서리를 맞았다. 그해 9월 주가가 1600포인트 대까지 떨어질 만큼 파급력은 대단했다. 이 기간에 허공으로 날아간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각국 정부와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미 연방정부의 일시폐쇄(셧다운)가 시작된 지난 1일(현지시간) 국제 신평사의 입을 주시했을 것이다. 피치는 미국에 부여한 최고 등급을 유지한다고 밝혔고, S&P는 신용등급 상승을 기대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등급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국제 신평사들은 각국 정부를 향해 권고나 경고도 서슴지 않는다. 최근에는 “소비세를 올리지 않으면 국가신용등급을 낮추겠다”고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소비세를 5%에서 8%로 올리기로 결정하는 데 국가부채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신평사들의 경고도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신평사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국제 신평사가 ‘갑’의 지위를 누린다면 국내 신평사는 ‘을’의 입장에서 고객사 눈치를 본다.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을 경우 그룹 전체가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협박하면 ‘병’ ‘정’의 위치로 추락한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발행하기 전에 더 좋은 신용등급을 제시하는 신평사에 평가를 의뢰하는 ‘신용등급 쇼핑’ 사례도 적지 않다. 회사채나 CP 발행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업들은 기를 쓰고 후한 점수를 주는 신평사를 찾는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올 리는 만무하다.

국내외 신평사로부터 중복 평가를 받은 한국 기업 22곳의 신용등급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국내 신평사가 얼마나 고평가를 남발하는지 알 수 있다. 국제금융센터가 지난 5월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신평사의 신용등급이 국제 신평사보다 평균 6단계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신용등급 인플레’가 만연한 것이다.

신용등급 고평가로 인한 부작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좋은 신용등급을 받은 LIG건설과 웅진홀딩스가 CP를 발행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바람에 개인투자자들만 애꿎은 희생자가 됐다. CP 피해자만 4만여명을 양산한 ‘동양그룹 사태’도 부실한 신용평가가 화를 키웠다. 원칙대로 신용평가를 했다면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CP를 발행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동양그룹 계열사 가운데 8월 말 이전에 투기 등급인 C등급을 받은 회사는 한 곳도 없었다. 그러다가 한 달 만에 A등급이 D등급으로 떨어졌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신평사를 평가하는 기관이라도 나와야 할 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평사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다. 우선 기업이 전액 부담하는 수수료 체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횡포를 줄이기 위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신평사를 교체하는 순환평가제도 검토할 만하다. 기업이 신평사에 객관적인 자료를 넘기는 것을 의무화하고 따르지 않을 경우 강제하는 방안도 도입해야 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