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훈 장편소설 ‘나비잠’… 욕망이 빚어 낸 치밀한 악몽의 서사
입력 2013-10-10 17:23
“탕! 흩어진 총소리가 사방 벽에 메아리치다가 가슴팍의 한 점을 향해 몰려들었다. 무딘 정으로 쪼는 듯한 통증이 명치끝을 파고들었다. 뒤로 떠밀린 몸뚱이가 난간에 얹히더니 기우뚱, 하늘과 땅이 자리를 맞바꿨다. 아, 총에 맞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소리 무지하게 크네. 바위에 부딪치고 덤물에 쓸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14쪽)
2007년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소설가 최제훈(40·사진)의 신작 장편 ‘나비잠’(문학과지성사)은 주인공 최요섭이 총에 맞는 꿈에서부터 시작한다. 요섭은 법무법인 ‘사해’의 변호사다. 그에게는 법조계에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다. 윗선에 어필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관뿐이다. 그는 ‘사해’에서 뒤가 구린 사건을 도맡은 덕분에 ‘피 묻은 칼’을 맡겨도 좋을 팔 안쪽 사람으로서 깊은 신임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도입부에서부터 총에 맞는 불길한 꿈이라니.
지난해 ‘웹진 문지’에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면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이 소설의 한 축에서는 불온한 판타지가 꿈의 형태로 강력한 서사적 동력을 제공하고 있고, 다른 한 축에서는 냉혹한 현실의 이야기가 그 판타지와 공조하며 숨 가쁜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거 금방 안 나와. 작업장 역학조사에, 개별 역학조사에, 추가 조사에, 보완 조사에, 최종 보고서까지 일년은 더 걸릴 걸. 그 후에나 행정소송하고, 그거 끝나야 손배 소송하고, 항소하고 상고하고. 가압류 걸어놓고 그렇게 몇 년 질질 끌다 보면 없는 놈이 먼저 나가떨어지는 거지. 당장 애 분유 값이 묶이니까.”(27쪽)
산업재해 손배 소송을 맡은 후배 변호사에게 이렇게 조언하는 요섭은 적자생존의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상대방을 철저히 짓뭉개는 냉혈한이다. 그에게 있어 야구선수 지망생인 아들의 진학을 위해 뒷돈을 쓰거나 자기만 살겠다고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웬 반 푼어치 양심이라도 발동했던 것일까. 어느 날 대리기사의 누명을 벗겨준 일로 요섭은 회사에 밉보인다. 이 일로 ‘피 묻은 칼’은 후배에게 넘어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의 외도 사실이 담긴 사진이 회사로 날아든다. 몰락의 시작이다. 무엇보다도 인간 무의식에 짓눌려 있는 욕망이나 불안 등이 꿈에서 어떻게 발현하는지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치밀한 악몽의 서사가 압권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