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제부터 복숭아를 좋아하게 됩니다”… 하성란 소설집 ‘여름의 맛’

입력 2013-10-10 17:22


하성란(46)은 기다림의 작가다. 쉽게 글을 쓰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대상을 오래 바라봄으로써 얻게 된 기다림의 결과이자 보상이다. 7년 만에 낸 다섯 번째 소설집 ‘여름의 맛’(문학동네)은 오랜 관찰의 힘에서 얻어진 독특한 시선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의 주인공 최는 2004년 여름, 잡지 화보 촬영차 일본에 갔다가 홀로 교토 여행을 하던 중 은각사를 금각사로 잘못 알고 찾아간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의 한 장면인 불타는 금각사를 떠올렸던 것인데, 최는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가 건네준 복숭아를 우연히 맛본다. 나중에 헤어질 때 남자는 큰소리로 한 마디를 한다. “당신은 이제부터 복숭아를 정말 좋아하게 됩니다!”

문법에도 맞지 않는 말이 거슬렸던 최는 “웃기지 말아요”라고 대꾸한 뒤 이내 귀국한다. 그 복숭아 맛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8년 2월 숭례문이 불타고 있는 현장에 갔다 온 뒤였다. 불타는 숭례문에서 다시 금각사를 떠올린 최는 교토의 한 남자가 건네준 복숭아 맛이 불현듯 생각나 지방출장을 자처한다. 취재 갔다 오면서 유명한 복숭아 산지에 들러 복숭아 맛을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교토에서 맛본 그 맛은 아니었다. “맛은 맛이 아니라 추억이라고. 그럼 그날 교토에서 먹은 복숭아는 그와의 반나절 추억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는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 이목구비조차 분간이 되지 않는 그 남자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부터 복숭아를 좋아하게 됩니다.”(‘여름의 맛’에서)

실상 ‘여름의 맛’은 잃어버린 맛이자 상실의 맛이다. 어쩌면 불타는 숭례문의 맛, 불에 혀를 대본 것 같은 맛, 혼돈의 맛, 실패의 맛. 하성란은 소설 속 시간으로 4년 동안 복숭아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어느 해 어느 장소에서 잃어버렸을지 모를 상실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올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카레 온 더 보더’의 주인공 ‘그녀’가 스무 살 무렵 잠시 알고 지낸 영은을 떠올린 것은 카레 향 때문이다. 열아홉 살 그녀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에어로빅 강사가 되기 위해 등록한 속성 학원에서 영은을 만난다. 어느 늦은 밤 우연히 그녀는 영은의 집을 따라가게 되고 아침이 되자 영은은 아침을 차린다. 그런데 영은의 밥상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녀 말고도 더 있었다. 무려 다섯이나 되는 노인들이 어두운 방에서 영은의 밥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쿰쿰한 늙은이 냄새에 비위가 상했지만 영은이 만든 카레의 맛은 일품이었다. “비위가 상했지만 그녀는 영은이의 수고를 생각해서 겨우 카레밥 한 술을 입에 떠 넣었다. 도대체 카레에 뭘 넣은 걸까? (중략) 비위가 상하는데도 그녀는 숟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카레 온 더 보더’에서)

카레라는 향신료가 갖고 있는 강한 살균력 덕분에 그녀는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 그녀가 대학선배인 ‘김’하고 끔찍한 식사를 참아낼 수 있는 것도 그 음식점 메뉴 가운데 하나인 카레 향 때문이다. 그녀는 ‘김’이 이미 한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김’은 그런 사실을 감춘 채 그녀에게 그 연구소에 지원서를 내보라고 부추긴다. 참을 수 없는 위선과 모욕을 김은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어가면서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김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돌아설 수 있었던 것도 세상의 역한 냄새를 덮어주는 카레 향 때문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성란은 우리 삶의 외피 아래 숨은 생의 심연을 오랜 관찰의 힘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