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아랫집 윗집 사이
입력 2013-10-10 17:40
어린 시절의 아주 잠깐을 빼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코흘리개 시절에는 헌집 줄게 아파트 달라고 두꺼비를 꽤나 불러댔고, 사춘기 때는 밑도 끝도 없이 아파트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직접 살아보니 행복은 고사하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주먹이 우는 잿빛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5년 동안 거의 매 주말마다 가서 지냈던 아버지의 사택. 유명 건설사가 신도시에 지은 것으로 단지 내 정원도 예쁘고 외양도 깨끗하니 위풍당당했다. 그런데 세탁기 뚜껑 닫는 소리부터 화장실 소리까지, 윗집의 일상적인 대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소리가 들렸다. 새벽 5시쯤 등교하는 두 아들과 한 시간 뒤에 출근하는 아버지, 그리고 7시 즈음에 초등학생 딸이 차례대로 쿵쿵대며 내 머리맡을 뛰어다녔다. 오전에는 러닝머신 때문에, 오후에는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딸내미 때문에 거실 천장의 전등이 덜그럭거렸다. 나는 그렇게 새벽 두세 시까지 시달려야 했다. 한 달에 며칠뿐이었으니 망정이지 평생을 그 집에서 그들과 같이(?) 살아야 했다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요즘 층간소음으로 유혈사태까지 발생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분명 폭력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지만 솔직히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생각 먼저 들었다. 당해 보니 뾰족한 해결책도 없고 정말 고문이 따로 없다. 오죽하면 전문 법률회사가 나타나고 국가가 중재자로 나섰을까. 씁쓸하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무사히 해결되면 다행이지 싶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끝일까? 원인은 소음을 생중계하는 부실한 집에 있고 잘못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팔도록 허가해준 사람에게 있다. 그러니 해결의 출발점은 잘못을 한 그들이 되는 것이 맞다. 그래야 문제가 원만히 풀리고 복구책이든 방지책이든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인성과 가정교육은 그 다음 문제다. 소음 기준을 고치고 중재센터를 만들어 이웃 간의 소통과 배려를 강조하는 것은 어째 모양새가 말리는 시누이처럼 얄궂다.
언젠가 책에서 ‘집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안식의 공간이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밀성이 보장되는 피난처’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어야 할 쉼터가 요란하게 무너지고 있다. 이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과연 어떻게 메울 것인지? 답은 간단한데 풀려는 사람은 없고, 이래저래 쉴 곳이 필요한 오늘이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