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언어의 달인’은 없다… ‘학습의 달인’만 있을 뿐

입력 2013-10-10 17:25


언어의 천재들/마이클 에라드/민음사

19세기 이탈리아에 실존했던 주세페 메조판티 추기경은 무려 72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고 한다. 그는 최단시간에 새로운 언어를 학습하는 능력이 있었다. 우선 상대방에게 주기도문을 계속 외우게 해서 그 언어의 소리와 리듬을 파악한 뒤 명사, 형용사, 동사 등 여러 부분으로 쪼개 그 언어의 구조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이다. 메조판티의 이 일화는 과장된 전설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만약 메조판티의 언어학습법을 알 수만 있다면 누구나 초다언어구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국 텍사스대 출신 영문학자 마이클 에라드는 이 점에 착안하여 수십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초다언어구사자를 찾아 나선다. 두말할 나위 없이 첫 방문지는 메조판티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볼로냐 도서관. 사서로부터 낡은 상자 몇 개를 건네받은 그는 실망하고 만다. 유품은 메조판티의 존재를 증명해주긴 했지만 놀라운 재능까지 확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에라드는 살아있는 초다언어구사자들을 찾아내 그들의 언어적 천재를 확인하기로 한다. 그 중엔 22가지 언어를 습득한 유럽연합의 통역관 그레이엄 캔스데일도, 64가지 언어를 구사해 기네스북에 오른 그레그 콕스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입을 맞춘 듯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동시에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런 말에도 불구, 결국 엄청나게 노력하면 누구나 초다언어구사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자폐의 일종인 서번트증후군 환자인 크리스토퍼는 수십 가지 언어를 전부 비슷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고 복습 없이 활용할 수 있었지만, 자폐 환자의 특성상 일반적인 소통은 불가능했다. 그는 언어를 언어로 인식한 게 아니라 일종의 규칙으로서 전부 암기하고 있었다. 그 역시 에라드가 찾던 초다언어구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에라드는 이 조사를 통해 언어 학습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얻고 있다. 예컨대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천재 중 한 명인 요한 판레발러의 조언처럼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어떠한 방법을 쓰든지 간에 그 한 가지 방법에 계속 매달려야 한다. 언어엔 달인이 없다. 언어학습의 달인만이 있을 뿐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