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기업인 소환’ 역대 최고… 10대그룹 중 8곳 증언대 선다
입력 2013-10-10 05:18
올해 국정감사에서 국내 10대 그룹 중 8개 그룹의 최고경영자 또는 주요 임원들이 증인으로 채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증인 및 참고인으로 채택되는 민간 기업인이 역대 최고인 200명에 이르면서 웬만한 대기업들은 대부분 증언대에 서게 될 전망이다. 경제민주화, 일감몰아주기, 4대강 사업, 동양그룹 사태 등이 주요 출석 이유다.
◇10대 그룹 기업인들, 누가 왜 나오나=국회 각 상임위원회가 9일까지 합의한 증인 및 참고인 가운데 주요 기업 대표 및 임원, 경제 단체장 등 기업인들은 약 190명이다. 여기에 여야가 논의 중인 사람들까지 합치면 최종 규모는 200명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감에 호출된 기업인은 2011년 80명, 지난해 164명이었다.
일단 10대 그룹 가운데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 현대중공업, GS 등 8곳은 증인 채택이 확정됐다. 한진그룹은 증인 채택 논의 중이다. 경우에 따라 10대 그룹이 전부 증인으로 채택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은 불산 누출 사고 등을 이유로 산업통상자원위와 환경노동위에 동시 호출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자녀의 영훈국제중학교 부정비리 입학 문제로 민주당이 증인 채택을 요구하고 있다.
김충호 현대자동차 대표는 일감몰아주기 및 직영점·대리점에 대한 차별 등 문제로 정무위에서 증인으로 채택됐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일감 몰아주기 및 증여세 과세 문제로 기획재정위가 증인 채택여부를 논의 중이다. 윤갑한 현대차 사장은 비정규직 불법파견 문제 등으로 환경노동위에 출석할 예정이다. SK는 유정준 SK E&S 대표이사가 전력난과 관련해 증언대에 선다.
박종석 LG전자 부사장은 휴대전화 단말기 가격 문제로 백남육 삼성전자 한국총괄부사장과 함께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에 출석이 예정돼 있다. 최주식 LG유플러스 부사장은 통신사의 대리점 횡포 문제로 증인 채택됐다. 롯데는 신동빈 회장이 가맹점·대리점에 대한 횡포, 골목상권침탈 등 논란으로 산업통상자원위에서 증인 채택됐다. 신 회장은 역외탈세 및 지하경제 양성화 문제와 관련해 기획재정위에서도 증인 채택 여부가 논의되고 있다.
박기홍 포스코 사장은 공정거래협약 이행 자료 허위 제출 문제로, 김환구 현대중공업 전자산업본부장은 원전 부품 인증 비리와 관련해 각각 정무위와 미래창조과학방송통위의 부름을 받았다.
GS그룹은 임병용 GS건설 대표이사가 일감 몰아주기 및 보험요율 담합 문제로 국토교통위 증인으로 채택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허창수 GS 회장은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기획재정위에서 증인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내 관광호텔 추진 논란으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에서 증인 채택이 논의 중이다.
◇기타 주요 경제인들=상임위 별로는 정무위 59명, 국토교통위 47명, 산업통상자원위 36명 등이 기업인을 증인으로 많이 채택했다. 도성환 홈플러스 대표는 정무위 산업통상자원위 환경노동위 등 3개 상임위에서 증인으로 채택되는 기록을 세웠다. 동양그룹 사태와 관련해서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정진석 동양증권 사장이 증인으로 나온다. 신세계는 장재영 신세계백화점 대표이사가 증인석에 앉는다.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이동근 대한상의 부회장 등도 증인으로 나올 예정이다.
정치인들이 대기업 회장이나 경제단체장 등 기업인들을 국정감사장에 부르는 표면적인 이유는 ‘현안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다. 특히 올해는 일감 몰아주기, 4대강 사업, 비정규직 불법 파견, 산업재해 등 굵직한 경제·산업 현안이 많아 기업인 증인 규모가 예년보다 크게 늘었다. 정치권에선 “의혹이 있으면 나와서 해명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재계에선 “기업 면박주기”라는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9일 각 상임위별로 채택된 증인을 보면 기업인이 193명으로 전체 일반 증인(258명)의 74.8%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여상규 의원은 “올해 산자위 주요 이슈가 소상공인 보호, 골목상권 침해이다 보니 유통업체 관계자들이 증인으로 많이 채택됐다”며 “당초 100명이 넘었는데 그나마 48명으로 줄인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경제 관련 상임위원회에서 기업인 출석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국민의 이익과 직결된 경제문제에 대해 기업 관계자가 직접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유일한 장이 국정감사라는 설명이다. 국회 정무위 관계자는 “일감 몰아주기 의혹을 받고 있는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 대표가 국민 앞에서 사실관계를 밝히고 동양그룹 회장이 작금의 사태에 대해 설명하는 건 기업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밝혔다. 재계 입장에서도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 등에 대해 국회에 입장을 전달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문제는 20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많은 증인을 불러 신문하다 보니 진상을 밝히거나 의혹을 해소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해 국감에서 국회 정무위는 32명의 증인을 채택했지만 재벌그룹 회장 등 6명이 불출석했고 출석한 26명의 증인 가운데 질의를 받은 사람은 1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2명은 국감장만 지키다 돌아갔다. 출석한 기업인들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우도 많아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국감을 권위를 과시하는 장으로 악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국감장에서 의원들이 증인에게 답변할 기회조차 안 주거나 호통치듯 대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기업들도 이 부분을 가장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회장이 국감장에 불려나가 국회의원들 앞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호통만 듣다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면 기업 입장에선 이미지 실추 등 피해가 막대하다”며 “매년 국감 때마다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을까 기업 전체가 초비상”이라고 우려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최근 트위터에 기업인 증인 무더기 채택과 관련, “국회의 의례적인 권위를 뽐낼 시대는 지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국정감사 증인은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국가 기관의 기관장 또는 부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업인 증인 채택은 예외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기영 기자 권지혜 기자 eo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