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洪 감독의 로드맵과 신뢰
입력 2013-10-09 17:37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며칠 전 기자간담회에서 2014 브라질 월드컵에 대한 속내를 진솔하게 털어놨다. 그의 말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고민의 흔적도 적지 않았다. 눈앞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겠다면서도 당장의 승리에 목말라하는 여론에 부담을 갖는 듯했다.
그는 “팬들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브라질·말리전에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여러 차례 가진 평가전이 시원찮았다는 평가에 강심장인 홍 감독도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홍명보 스타일’대로 밀어붙이라고 권하고 싶다. 평가전에서 일희일비하면 선수들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경기력 향상에도 득 될 게 없다. 홍 감독 말대로 대표팀 목표는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다. 거기에 모든 일정을 맞춰놓고 전력이 극대화되도록 해야 한다. 다행히 홍 감독은 ‘오대영’이란 수모를 참아낸 히딩크 리더십을 예로 들며 “지금의 시행착오를 자양분으로 삼겠다”고 했다.
창의적인 축구에 대한 기대감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난 선수들을 다그치지 않고 대화를 시도했다. 감독의 일방적인 지시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이 처음엔 당황하더니 서서히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고. 그는 ‘창의적인 축구’를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사실 홍 감독도 ‘줄빳다’ 세대다. 선수가 아니어도 그 세대는 중·고교 감독들의 끔찍한 지도 방식을 눈으로 보고 자랐다. 당시 훈련이 끝나고 어두컴컴할 때 운동장 한켠에선 늘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거의 마찬가지였다. 그게 선수들의 정신력과 경기력을 높이는 ‘보약’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지금도 가끔 어린 선수들 경기를 보면 그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 그라운드 밖에서 감독·코치는 고함지르고, 선수는 운동장에서 뛰다 말고 잘못했다고 조아리느라 정신이 없다. 어려서부터 감독의 생각에 짜맞춰진 축구, 실수만 안 하려는 축구가 우리 선수들 몸에 밴 게 아닌가. 골 찬스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뻥 축구’도 그런 문화 탓이 아닌가 싶다. 홍 감독의 ‘창의적인 축구’를 적극 지지하는 이유다.
기성용 사면은 최선의 결정
홍 감독은 ‘SNS 파문’을 일으킨 기성용에게 출전 기회를 주겠다고도 했다. 그를 조기에 사면시킨 것은 적절한 결정으로 보인다. 우리 대표팀에서 미드필더로는 기성용만한 선수도 없다. TV가 아니라 경기장에서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보면 왜 기성용을 버릴 수 없는지 금방 알게 된다. 사실 홍 감독도 과거 파문에 휘말린 전력이 있어 동병상련인지도 모른다. 그는 1995년 코리아컵 때 ‘열하나회’ 술판 파문의 당사자였고, 다음해엔 박종환 전 감독에게 항의성 고의 패배를 안겨줬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혈기로 마음고생을 해봤기에 기성용에게 더 애착이 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기성용은 홍 감독에게 큰 빚을 졌고, 이젠 죽기살기로 뛰지 않을까 싶다.
기성용이 합류하면서 홍 감독 마음속에 선수 진용은 대충 짜인 듯하다. 내년 6월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어도 홍 감독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당장 브라질전에서 참패하더라도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주는 아량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야심이 크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인데 당분간 귀를 막는 게 낫겠다. 젊은 나이에 대표팀 감독을 하니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온다고 치부해도 될 것 같다. 내년에 브라질에서 결과가 좋으면 홍 감독은 영웅이 되는 거고, 졸전으로 끝나면 스스로 책임지고 떠나면 된다.
노석철 체육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