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지금 가장 외로운 시인, 고은

입력 2013-10-09 17:23


좀 차분해졌으면 싶다. 지난 8일 전북 군산시 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 ‘고은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 기원 선포식’과 축하공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알다시피 군산시 미룡동 용둔마을은 고은 시인의 생가 터가 있는 곳이니, 고은은 군산의 시인이자 군산이 낳은 시인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렇더라도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거창한 선포식에 이어 수상 기원 국악한마당과 합창 페스티벌 등으로 이어진 문화축제는 아무래도 남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예총 군산지부와 함께 선포식을 공동주관한 군산시 문화예술과에 따르면 정작 고은 시인은 이번 행사에 대해 일언반구 말을 섞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고은 시인이 당사자이기 때문에 사전에 승낙을 구하기가 어려웠다”면서 “다만 측근을 통해 선포식을 하겠다는 말은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은 시인이 최근 인문학 도시 육성에 나선 수원시의 노력으로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더라도 생가 터는 군산에 있기에 군산의 시인인 건 맞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좀더 복잡하다. 수원시에 고은을 선점당한 군산시는 내년부터 생가터 복원 사업에 들어가는 등 고은에 대한 연고권을 행사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고은은 어쩌면 이미 시간성과 장소성에서마저 자유로운 시인이요, 독일문학진흥협회의 말처럼 ‘우리 시대 위대한 시인들의 샤먼’이지 않은가. 그래서 문학관 건립도 수원시의 일이요, 생가터 복원도 군산시의 일일 뿐, 고은의 일은 아닌 것이다. 짓는다면 짓고 부순다면 부술지언정 정작 고은 시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더욱이 노벨상 주간이 시작되는 10월 들어서는 말수가 더 적어진다. 본인은 아무 말도 없는데, 왜 우리는 10년 넘게 ‘고배’나 ‘불발’ 등의 단어를 나열하며 노벨문학상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는가. 올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원 광교산 자락 시인의 집에는 기자들이 몰려갈 테고 수상에 실패하면 방송사 중계차량은 안테나를 접고 아쉬움의 발길을 돌릴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반복의 이면엔 노벨상 수상자를 19명이나 보유한 일본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이 숨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와 오에 겐자부로(1994)가 이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후보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꼽히고 있다고 하니 그 역작용으로 고은의 수상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우리 내부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중국의 경우 프랑스 망명작가 가오싱젠이 1987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는 했지만 프랑스 국적이었고, 지난해 모옌이 수상하면서 첫 수상자를 냈으니 한·중·일 동북아 3국 가운데 노벨문학상 불모지는 여전히 한국이다. 여기서 짚어볼 건 고은의 입장이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는 날이면 언론의 과도한 관심사를 피해 일부러 집을 떠나 있곤 했던 과거의 행적을 볼 때, 10월은 그에게 잔인한 달이다.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한다 해도 노벨상 주간이 되면 가장 민감해지는 건 고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 고은은 외롭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팡파르 소리가 괴롭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외로움과 괴로움을 견디는 일이야말로 고스란히 고은의 몫일 것이다. 그래서 군산시의 ‘고은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 기원 선포식’은 민망함의 극치이다. 시인은 세계를 고향으로 두기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여기서 이달 초 단국대와 수원시 주최로 열린 세계작가 페스티벌 참여 차 방한한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IWP) 책임자 크리스토퍼 메릴의 말을 곱씹게 된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위대한 작가들이 허다하니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한국 작가들이 높은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