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⑭ 한국교회와 민주화 운동

입력 2013-10-09 17:09


한일협정-3선개헌-유신 반대 등 고비마다 민주화 깃발

한국교회는 1960∼80년대 막혀 있던 언로를 대신하고, 유신체제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구속자들을 위해 기도회를 조직하는 등 민주화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계몽을 위해 헌신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 시절 권력과 유착에 대한 자성의 결과물이다.

한국교회는 1945년 해방 이후 정치적 혜택을 누리기 위해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등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현 NCCK), 기독교도연맹, 조선예수교장로회, 기독교청년회 등 교단·기독단체 대표가 직접 출마했으며, 그 가운데 8명이 당선됐다. 제헌국회에는 198명 가운데 목사직을 가진 사람이 13명이나 됐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한국기독교연합회 주도 아래 ‘기독교선거대책위’가 조직돼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다.

‘교회가 정치단체가 돼서는 안 된다’ ‘교회가 특정 정당에 편승하거나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특정 정당 내지 정치인에 대한 공개 지지는 끊이지 않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분위기가 확산됐을 때도 ‘정·부통령 당선 및 이 대통령 생신 축하예배’를 여는 교회가 있었을 정도로 친권력적 행보가 이어졌다.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 사이의 밀월관계는 4·19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하게 만들었고, 감리회 총회원과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사과성명까지 발표했다.

한국교회는 아픈 과거를 딛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본격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65년 7월 강신명 강원용 김재준 한경직 목사 등 교계 지도자를 비롯한 기독교인 215명은 박 대통령이 조인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구국기도회를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고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한 구국기도회가 개최되는 등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1969년 박 전 대통령이 3선개헌을 시도하자 김재준 박형규 목사와 함석헌 등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회 지도자들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개헌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이 무렵 교단 간 협의체로 명칭과 조직 구성을 변경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3선 개헌을 반대하는 교회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초교파적으로 확대됐다.

1972년 12월 공포된 유신헌법은 교계를 유신 찬성 측과 반대 측으로 양분했다. 1973년 4월 발생한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은 교계의 대표적인 유신 저항운동으로 꼽힌다. 당시 야외 예배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한다는 전단지가 배포되자 유신정부는 박형규 목사와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회원들을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각종 기도회와 가두시위, 학생 시위의 원동력이 됐다. 같은 해 11월 NCCK가 채택한 ‘인권선언’은 마땅한 지원 세력이 없던 민주화운동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기독교와 비기독교인이 민주화운동을 위해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1974년에 이르러 긴급조치가 선포되자 교계의 저항운동은 더욱 뜨거워졌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NCCK는 인권위원회를 결성하고 목요기도회를 통해 저항의 의지를 표출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선언서를 채택했고, 예장 통합과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에서도 시국선언문이 발표됐다. 그해 11월에는 한국교회 진보 신학자 66명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을 발표, 한국교회와 인권·민주화운동의 신학적 접점이 마련되기도 했다.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열기는 1980년대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 기독교농민회, 기독노동자연맹 등 부문별 시민단체 결성과 민중교회 탄생으로 이어지며 기독교 사회운동의 외연이 넓어지는 발판이 됐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