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를 ‘개비’로 표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입력 2013-10-09 04:58
23년 만에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한글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법과 금융 분야 등 ‘공공언어’는 여전히 외래어가 난무하고 있다. 7일 한글문화연대가 주최한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 세미나’에서는 민법과 금융용어, 각 지방자치단체의 표어 선정 등에서 한글이 홀대받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행 민법은 ‘궁박(窮迫)’ ‘요(要)하다’ ‘통정(通情)한 허위(虛僞)의’ 등 한자로 된 구절이 대부분이다. 각각 ‘궁핍’이나 ‘요구하다’, ‘서로 합의한 뒤 허위’로 순화하는 것이 더욱 쉽고 자연스럽다. 2007년 정치권을 중심으로 민법을 한글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민법 조문을 인용하고 있는 법률까지 다 바꿔야 한다는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법제처 법령정비담당관실 김혜정 서기관은 “한글이 없다시피 한 민법을 한글로 쉽게 고쳐 쓰는 작업을 올해 안에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금융용어도 마찬가지다. ‘열다’를 ‘개비(開扉)’로, ‘서로 다르다’를 ‘상위(相違)하다’로, ‘두 눈을 뜨다’를 ‘양안시(兩眼視)’로 표현한다. ‘커버드 본드(covered bond)’처럼 영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용어도 부지기수다. 때문에 용어를 모르는 소비자는 골머리를 앓는다. 지난 5월 금융감독원이 은행과 보험, 카드 등 금융사의 거래 표준약관 가운데 어려운 금융용어 114개를 개선하기로 하고 금융사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각 지자체의 표어도 영어로 된 것이 많다. 최근 ‘희망 서울’로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 서울의 도시구호는 ‘Hi Seoul’이었다. 부산은 ‘Dynamic Busan’, 대구는 ‘Colorful Daegu’다. 부천은 ‘Fantasia Bucheon’, 대전은 ‘It's Daejeon’을 각각 표어로 내세웠다. 이상규 경북대 교수는 “쉽고 기억하기 좋은 영어 단어를 선택해 홍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면서도 “작은 것에서부터 한글을 아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부처와 국회, 대법원이 낸 보도자료도 허점이 많다. 한글문화연대가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17개 정부부처와 국회, 대법원이 낸 자료를 분석한 결과 외국 글자나 한자를 본문에 그냥 써 실정법인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사례는 보도자료 3068건 중 8842회에 달했다. 보도자료 하나마다 평균 2.88회를 위반한 셈이다. 국어기본법 14조 1항은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규정돼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정부 차원에서 공공영역에 버젓이 쓰이는 외래어를 한글로 대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