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중간고사와 가을 하늘

입력 2013-10-08 17:41


단언컨대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때는 중간고사 때다.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는 것은 곧 중간고사가 시작된다는 얘기이며 쪽빛 가을 하늘을 보고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는 것은 곧 시험공부에 돌입해야 할 때라는 의미다. 중간고사가 발목을 붙잡고 밖으로 한 발짝도 편하게 내딛지 못하게 할 때 세상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게 온통 아름답다. 지난봄엔 그런 말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다시 또 지금은 중간고사 기간. 보아라. 세상이 또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세상의 모든 축제가 다 중간고사 기간에 맞춰 시작하는 것을.

인천에서는 국화 축제, 구리에서는 코스모스 축제, 여의도에선 세계 불꽃 축제, 파주에선 책 축제와 판 페스티벌, 자라섬에서는 재즈 페스티벌, 진주 남강에서는 유등 축제, 전주에서는 세계 소리 축제, 여기에 안면도 새우 축제, 양양 송이 축제, 횡성 한우 축제 등 각 지역의 특산품들을 앞세운 지역 먹거리 축제들도 참으로 많다.

여기저기 가을 축제를 만끽하는 사람들 속에서 학생 청취자들의 한숨 섞인 중간고사 사연을 전할 때는 좀 딱하다. 중간고사를 회사 프로젝트 리포트나 논문, 주말 근무, 마감을 앞둔 글쓰기 등으로 살짝만 바꾼다면 이 심정을 이해할 만한 사람은 많아진다.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 말고는 세상이 다 재미있고 즐거워 보이는 현상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무언가를 하기 싫은 에너지는 어마어마해서 반대급부로 내가 참여하지 못하는 세상을 두 배 이상 아름다운 곳으로 승격시키거나 아니면 종종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방출하게도 한다.

시험공부를 하기 싫은 에너지는 내게 필통정리의 힘으로 쓰였다. 나는 학창시절 시험기간 때마다 심혈을 기울여 필통정리를 했었다. 열정을 다해 펜들을 키 순서대로 세우고 볼펜 똥을 닦느라 시험공부 시간이 모자랐다. 그 습관은 몇 해 전 대학원 중간고사 때 수첩정리와 지갑정리, 책상정리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났었다.

시험 볼 일이 없어지자 나는 본연의 정리정돈에 관심이 없는 상태로 돌아왔고 맘껏 만끽하는 가을 하늘과 벚꽃도 솔직히 그때보다는 약간 시들하고 심심해졌다. 그러니 중간고사 기간 중인 친구들이여. 애꿎은 필통 정리 중인 그대들이여. 하늘 한 번 올려다보시라. 그대들이 지금 바라보는 가을 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하늘은 없다.

김용신 (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