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이만우] 금융공기업은 천사인가?
입력 2013-10-08 17:28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이 찬송가를 튼 녹음기를 목에 걸고 지나가고 있었다. 옆 좌석 중학생이 지갑에서 깨끗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접시에 올려놓았다. 어른 일부가 100원짜리 동전 몇 개씩 놓는 터이라 특별히 눈에 띄었다.
조금 있으니 다른 장애인이 또 다가왔다. 학생은 다시 지갑을 열어 한 장 남은 지폐를 마저 꺼냈다. 다급히 가로막으며 이번에는 내가 낼 터이니 그냥 넣어두라고 말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른 노인이 다시 다가왔고 학생은 또 지갑을 꺼냈다. 저렇게 여린 마음으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이 됐다. 앞으로 자라서 금융공기업 자금담당은 맡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금융공기업의 간판인 산업은행이 또다시 곤혹스럽게 됐다. STX사태로 떠안은 부실채권이 산더미인데 동양그룹이 새로운 화근으로 등장한 것이다. 동양그룹 주력인 동양시멘트의 은행 여신 대부분은 산업은행 몫이다. 산업은행은 대우사태 이후 초대형 금융부실의 단골 주채권은행이다. 다른 금융회사가 여신을 줄여서 빠져나가는 사이에도 산업은행은 계속 자금을 보태 판을 키웠다. STX의 경우 여신총액이 13조원인데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를 비롯한 금융공기업 채권이 11조원을 차지한다. 금융회사 시장점유율 구조를 따져보면 극히 이례적인 쏠림 현상이다.
금융부실이 생길 때마다 금융공기업이 왕창 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에서는 금융회사로서의 공적기능에 충실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한다. 일부 민간은행의 약삭빠른 자금회수를 원망하기도 한다. 사실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 단자회사 출신 은행의 발 빠른 자금회수는 얄밉기도 하다. 은행회장이 오랜 친분의 친구 사업까지 매몰찬 자금회수로 쓰러뜨렸다는 소문도 돌아다닌다. 그러나 제때 정리하면 뒤탈 없이 끝낼 사건을 시기를 놓치고 질질 끌다 엉망으로 만든 경우도 많다. 시간을 끌어 줄 당시에는 금융공기업이 시혜를 베푼 것 같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피해가 오히려 증폭돼 원망을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극동건설 인수실패가 화근이었던 웅진사태에서 극동건설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은 3000억원에 이르는 대출채권을 날릴 각오로 만기연장을 거절했다. 그간의 건설경기 추세를 보면 그때 시간을 끌어줬더라도 호전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었고 손실만 늘어났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기업에 자금이나 보증을 제공하는 금융공기업은 산업은행 이외에도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농협 등 여럿이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금융도 10년 넘게 금융공기업 상태다. 금융공기업은 경영자 인사를 비롯해 모든 업무에서 정부와 정치권 간섭에 노출돼 있다. 시장원리에 따라 신속히 처리할 사항도 정치적 고려에 따라 어물거리다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업무처리의 적법성을 두고두고 따지기 때문에 과감한 의사결정보다는 어물거리며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가혹한 반면 좋은 결과가 나와도 특별한 보상이 없는 것도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금융공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훨씬 더 높다. 우리금융 매각에 박차를 가하고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민영화도 앞당겨야 한다. 수출입은행의 수출지원도 자유무역 기조에 어긋나 무역마찰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공기업이 경제관료 및 정치권의 낙하산 투하에 계속 활용되는 상황에서 민영화의 자발적 추진을 기대하기 어렵다. 공기업 우산 속에서의 안정적 직장생활을 희망하는 임직원에게도 민영화는 기피대상이다.
금융공기업 실패에서 오는 손실은 국민이 모두 부담한다. 금융공기업에 의한 자금시장 왜곡도 결국은 기업의 손해로 전가된다. 금융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강력히 표출할 시점이다.
이만우(고려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