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곽희문 (8) 유치원 안정되자 지역 비행청소년 선교 소명이

입력 2013-10-08 17:21 수정 2013-10-08 19:13


엘토토유치원은 쓰레기장 옆이라 냄새와 파리떼 때문에 늘 골치였다. 그런데 근처에 있던 케냐 청각장애인협회가 이사를 하면서 임대공고를 냈다. 운동장도 있어 우리에겐 최적이었다. 바로 달려가 임대를 요청하니 유치원이 사용하면 아이들 때문에 건물이 망가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달 전부터 청각장애 어린이를 모아 북찬양 연습을 시작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금방 표정이 달라졌다.

“청각장애 어린이들을 잘 보살펴주세요. 그래서 특별히 허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 새로 이사를 한 넓은 건물에서 축구도 하면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뒤뜰에 허술하지만 대충 함석지붕을 얹어 강당도 만들고 아이들 유치원복도 디자인해 입혔다. 70벌의 원단비 150만원은 한 자매가 때맞춰 헌금해 은혜롭게 채워졌다.

유치원생에 단체복을 입히니 원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긍지가 대단했다. 이제 엘토토는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유치원으로 부상하며 서로 들어오려는 곳이 되었다.

유치원이 안정되자 나는 지역 슬럼가 청소년들을 선교대상으로 삼았다. 할 일없이 본드를 흡입하며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들에게도 복음이 나눠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문제 청소년들을 엘지아(El Gia)라고 불렀다. 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고 지아는 스와힐리어로 ‘거리’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바르게 살자며 몇몇 비행 청소년들을 유치원에 데리고 왔다. 한국이름을 지어주고 씻기고 새 옷을 입혔다. 이 선교하는 과정에서 나는 본드에 취한 한 청소년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다리를 맞아 뼈가 부서져 기절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만약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못했다면 난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순교도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다리 때문에 한국에 치료도 받으러 가야 했고 지금도 온전치 않지만 선교사 훈장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청소년들은 유치원에서도 물건을 팔아먹는 등 구습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그저 인내하며 기다렸다. 사랑만이 이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불량 청소년들을 데려와 순화시키는 일에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너무 위험하고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키시니 하는 것뿐이었다. 나도 힘들고 현재 유치원 운영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꾸 하라는 감동을 주시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엘지아들을 모아 1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엘지아들은 암담한 가정환경과 주변이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방황하며 사고를 치게 만들었다. 계속 사랑으로 보듬고 격려하니 엘지아들도 서서히 변화를 보였다. 학교를 가겠다고 했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엘토토 북찬양단을 만들게 된 사연이 있다. 고로고초에서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데도 그냥 걸어가던 어떤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다행이 많이 다치지는 않아 내가 집에 데려다 주었는데 이 아이가 청각장애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조차 ‘듣지 못하는 바보’라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알고 지내던 아프리카 전통 북연주자인 프란시스를 찾아가 청각장애아들을 모아 북찬양단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가 내가 하도 졸라대니 일단은 해보자고 승낙했다. 케냐는 말라리아에 걸린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은 아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