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상품 가입에 고객 대리 서명까지… 은행 경비 “내 이름은 슈퍼乙”

입력 2013-10-07 17:57 수정 2013-10-07 22:25


20대 후반인 A씨는 6개월 전 한 시중 은행에 경비로 취직했다. 사람들이 흔히 청원경찰이라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은행 경비다. 청원경찰은 경찰력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등에 배치된 사람이다.

부모님은 A씨가 은행에 취업했다며 자랑스러워하셨다. 은행원은 아니지만 멋진 제복을 입고 유사시에 고객을 지키는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A씨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 품었던 생각은 사라졌다.

출근해서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고객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라며 인사하는 것이다.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은행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자신이니 웃는 얼굴로 더 밝게 인사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러워 뒷걸음질치는 고객이나 자신을 동료가 아닌 잡부 정도로 여기는 직원을 마주할 때면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수년째 은행 경비 일을 하고 있는 B씨도 마찬가지다. 돈을 만지는 일을 빼곤 대부분 B씨의 몫이다. 업무 성격에 따라 고객에게 번호표를 뽑아주고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고장났을 때 조치를 취하고, 공과금 수납기 사용에 미숙한 고객도 도와준다. 심지어 화단에 물을 주고 틈틈이 지점 내 청소까지 담당한다. 최근 B씨는 인근 지점 경비 C씨로부터 직원들의 개인적 심부름까지 도맡아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계약서에는 질서 유지와 고객을 보호하는 업무만 명시돼있다.

부당함을 느낀 B씨는 자신이 소속된 용역업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그냥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갑’인 은행과의 계약에서 ‘을’의 입장인 B씨의 회사는 B씨를 대변해주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은행에 직접 얘기를 꺼냈다가 “당신 말고 일할 사람 많으니 싫으면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B씨는 ‘슈퍼 을’인 처지를 절감하며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금융상품이 나올 때마다 압력이 가해졌다. B씨는 100만원 초반대 월급으로 생활하기도 빠듯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저축상품이며 보험에 가입했다. 고객이 서류를 작성할 때 빠뜨린 이름이나 서명을 대신하기도 했다. B씨는 이것이 금융실명거래법에 위반되는 사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나중에 문제가 될까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켕기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가물에 콩 나듯 은행 경비가 은행원으로 채용되는 뉴스가 들린다. 한 시중 은행은 10년 이상 근무한 만 53세 경비원을 은행 소속의 계약직으로 전환해주기도 한다. A씨와 B씨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자신들도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본다.

박은애 기자 limitle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