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처월드
입력 2013-10-07 17:41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고 돌아와 부엌에 있는 밥솥을 열어보니 텅텅 비었다. 라면이라도 있을까 싶어 찬장을 열다가 찬밥 그릇이 떨어지자 쏟아진 밥알을 입안에 넣으며 가족들이 깰까봐 도둑고양이 흉내를 낸다. 아침밥도 못 얻어먹고 출근하는 뒤통수에 “재활용품 대문 밖에 내다놓고 쓰레기도 다 버리고 가라”는 앙칼진 잔소리가 따라온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의 맏사위 ‘고민중’ 얘기다.
돈 잘 벌어올 때는 ‘백년손님’ 대접을 받았지만 사업하다 쫄딱 망해 처가살이를 하다 보니 장모의 박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입만 열면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 이거 왜 이래?”라고 소리 지르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부인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며 ‘처월드’(처가댁)에서 공주처럼 산다.
처월드가 아주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는 딸을 주겠다며 머슴살이를 실컷 시켜놓고 골탕만 먹이는 장인과 데릴사위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화가 나서 장인과 대판 몸싸움을 벌이지만 자기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점순이가 장인 편을 들자 서운해한다.
우리가 그동안 봐온 드라마는 막장 시어머니와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세였다. 평범한 집안 출신 며느리를 아들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불륜녀로 몰아 내쫓는 TV 드라마 ‘백년의 유산’의 시어머니는 악랄함의 진수를 보여줬다. 갓 시집 와서 한겨울 개울가에서 이불호청 빨래하고, 놋그릇 다 닦아놓고, 어린 시누이 잔심부름까지 하면서 365일 내내 허리 펴기가 힘들었던 게 우리 어머니 세대들의 고단한 삶이었다.
세상은 시월드(시댁)에서 처월드로 바뀌고 있지만 아직까지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결혼’이 족쇄인가보다. 얼마 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전국 남녀 9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결혼 전과 비교해 더 행복해졌느냐”는 질문에 여성 쪽이 훨씬 부정적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는 물음에는 결혼하겠다는 남성은 45%에 달한 반면 여성은 19.4%에 그쳤다. 임신·육아, 가사, 시댁과의 갈등이 결혼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라는데 가뜩이나 독신 여성들이 늘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어 걱정이다.
‘작은 소리로 아들을 위대하게 키우는 법’의 저자인 일본 교육컨설턴트 마쓰나가 노부후미의 말대로 “미래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여성에게 배우자감으로 인정받는 남자이고, 이는 남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뿐인 아들이 걱정된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