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말은 쉬워도
입력 2013-10-06 17:38
말은 쉬워도 막상 자신이 직접 겪어 보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세상만사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갈수록 타인이 겪는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못하는 것이다. 나 역시 목회의 햇수가 쌓이고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말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럽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권면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예전에는 정답을 말해주었지만 이제는 정답을 알고 있어도 그 말을 선뜻 잘하지 못한다. 아니, 때로는 어떤 말보다도 그와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어쩌면 그 사람이 정답을 이미 잘 알고 있을 터이요, 그걸 알아도 자신의 마음과 몸이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의 한계, 바로 그것 때문에 몸부림을 치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를 한번 보라. 30세에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는 역사에 탁월한 기독교 변증서들을 많이 썼다. 그중에 ‘고통의 문제’와 같은 책은 인간 고통에 대한 매우 깊이 있고 차분한 통찰이 단연 돋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그가 직접 지옥 같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토해낸 고백적 담론 ‘헤아려본 슬픔’을 보라. 그의 나이 59세에 그는 여류 시인 조이(Joy)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불과 4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뒤 그는 자신 속에서 괴물처럼 일어나는 마음의 격랑을 좀처럼 다스리지 못한다. 그렇게 냉철하고 깊이 있게 고통의 문제를 마치 메스를 든 외과 의사처럼 능숙한 솜씨로 다루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이 직접 그 고통의 파도에 휩쓸렸을 때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 철저하게 무력감에 짓눌린 자신의 모습 앞에 얼마나 정직한 고백인가? 하나님께 다가가면 나는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꽝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가 하나님께 느끼는 좌절감 역시 너무 솔직하다. 이전에 그가 고통에 대해 했던 말이 무익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든지 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믿음의 거인이라고 해서 비명도 지르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는 사면초가의 고통 중에 자신을 ‘아이를 낳으려 하지만 해산할 힘이 없는 여인’(사 37:3)에 비유했다. 머리로는 분명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만, 그렇게 할 힘이 없다는 진솔한 고백이다. 중요한 것은 이 솔직한 고백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자신을 포장하려 했던 아하스를 하나님은 괘씸하게 여기셨다. 말은 쉬워도 막상 우리가 겪으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이 사실을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 하나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