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홍하상] 영국 여왕의 가치는 80조원

입력 2013-10-06 17:55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라는 말이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왕실에 물건을 납품하는 어용상인을 보증해주는 제도이다. 영국 왕실에 물건을 납품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납품자의 성실성 등이 인정받아야 한다. 로열 워런트라는 문장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왕실에 3년간 무료로 제품을 제공해야 하며, 5년 이상 거래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거래 후 7년이 경과했을 때부터 심사 대상에 올려진다. 이후 늘 최상의 품질과 왕실에서 필요한 만큼의 납품량을 제때에 공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등을 심사하게 된다.

까다롭게 선정되는 로열워런트

심사를 통과하면 ‘체인벌리 결의 법령’에 의거해 공식 로열 워런트 보유자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된다.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영국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영예로운 위치에 오른 것으로 인정되며, 그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 혹은 서비스의 질에 대해 영국 여왕이 이름을 걸고 보증한다는 뜻이 된다. 로열 워런트가 되면 소비자들이 신뢰할 뿐만 아니라 금융권에서도 신용등급 최상위권으로 분류된다.

현재 로열 워런트 허가 대상은 ‘왕실 멤버에게 납품하는 상인’으로 개인 또는 회사이다. 개인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는 한 로열 워런트가 평생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유흥업소 종사자, 엔터테인먼트 업종, 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등은 허가 대상에서 원천 배제된다.

로열 워런트가 되면 상당한 이익과 권위가 따라붙는다. 즉 영국 왕실의 공식 문장을 자사의 상표, 포장, 건물, 차량 등에 부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며 자신의 상행위로 인쇄되는 모든 포장지 혹은 공문에 ‘바이 어포인먼트 투(By Appointment To)’라는 문구를 사용할 수 있다.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왕실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로열 워런트가 되기 위해서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 그의 남편인 에든버러 공, 찰스 황태자, 황태후 중 적어도 한 명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선정된 영국 왕실의 어용상점은 2012년 6월 1일 기준으로 928개사이다. 이 중 엘리자베스 여왕이 칙허를 내려 승인한 회사는 705개사, 찰스 황태자가 허가한 상인은 174개사,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에든버러 공이 허가한 회사는 40여개 등이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찰스 황태자, 에든버러 공 3인이 동시에 허가한 납품 사업자는 7개사에 불과하다. 로열 워런트의 대표적 브랜드로는 패션 분야의 아쿠아스큐텀, 버버리, 닥스, 도자기의 웨지우드, 로열 덜튼, 홍차의 트와이닝스, 자동차의 벤틀리, 랜드로버, 애스턴 마틴, 복스 홀 등이 있고, 벽시계의 찰스 프러드샴, 담배의 벤슨 & 헤지스, 겨자의 콜만스, 오디오의 린 프로덕스, 피아노의 스타인웨이 & 선스 등이 있다. 로열 워런트의 자격은 영국 내 기업이나 장인만 갖는 건 아니다. 외국 기업과 장인도 심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로열워런트협회로부터 인정받으면 납품이 가능하다.

세계 최고의 제품 만들라는 뜻

로열 워런트로 선정되면 초기 3년간 무료로 납품해 손해가 많이 발생할 것 같지만 그보다는 이익이 훨씬 많다. 영국 여왕의 경제적 가치는 8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영국을 대표하는 소매점 기업인 태스코 혹은 세계적 의류 브랜드인 마크 & 스펜서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여왕이 사용하는 모자, 코트, 구두, 시계, 목걸이, 스카프, 반지 등은 여왕이 움직일 때마다 TV, 신문 등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해당 업체는 자연스럽게 광고가 되고 그로 인한 경제 파급효과가 80조원에 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국 왕실은 영국 기업들에 당대 최고의 제품을 만들라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그러한 명품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홍하상 논픽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