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이옥희 인도 선교사] 내려놓음
입력 2013-10-06 17:19
“하나님 손은 짧지 않다”… 재난구호에 뜻밖의 1000만원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의 내려놓음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도전과 성찰의 길을 보여줍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겸허히 나누며 섬기는 사람들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하지만 저의 내려놓음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음’이 주는 불안과 의심,
두려움, 열등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의식주에 대한 염려와 걱정,
소명에 대한 불평과 원망,
얄팍한 이해타산과 절망감, 무능감 등도
내려놓습니다.
한 번 내려놓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매일 매일 내려놓아야 합니다.
1997년 말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후원에 의존한 나그네로 외국에서 살아야 했던 저는 거지가 된 느낌에 종종 빠졌습니다. 당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소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체면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내려놓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려놓아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내려놓음이지요.
기장 총회 해외선교국의 요청으로 사역지를 뉴델리에서 남인도로 바꾸게 됐습니다. 실맛신학교 장학금과 기숙사 완성, 영어 교육비 후원이 여전한 과제로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다’는 믿음으로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남인도로 내려와 곧장 달리트 장학금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데칸고원 오지 교회에 여러 명의 전도사를 세우도록 협력하며, 후원이 부족하면 개인 생활비로 대신할 요량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공급을 끊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이집 두 곳의 점심 급식과 에이즈 피해 아동들의 그룹홈 운영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하고 계십니다.
이 가운데 첸나이 희망발전소의 건축 과정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게 된 전율의 연속이었습니다. 조건 없이 헌금을 한 이리여중 시절 친구와 즉석에서 흔쾌히 거금을 쾌척해 주신 권사님은 지금도 코끝을 찡하게 만듭니다.
2008년 여름,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미얀마의 마라족에게 긴급구호의 손길을 펼친 사건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 현지인 신학생이 두 차례 저를 찾아와 기아에 직면한 자기 마을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정은 딱했지만 빈손이었던 제게는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인도 미조람과 미얀마 국경지대에서 일어나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 기근은 2006년 대나무의 고사와 전염병 창궐로 이어져 2년여 동안 7만여명이 생활하고 있는 마라족 105개 마을을 황폐화시켰습니다.
어린이들은 영양실조와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이 신학생은 견딜 수 없는 아픔 때문에 성탄절 방학을 맞이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다시 한 번 이메일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발 세계경제 파탄으로 인한 환차손을 극복하고자 사활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족을 사랑하는 청년의 고뇌와 눈 속에 가득 찬 그의 눈물이 저의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은 쌀 1000㎏ 구입비와 구호에 필요한 부대비용 정도에 불과했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구호는 기적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배 이상의 쌀이 한국에서 파송된 청년 편에 전달됐고, 100가마의 쌀이 비전아카데미에서 훈련받고 있는 청년들 편으로 보내졌습니다. 수중에 있는 작은 것을 내려놓자 불과 몇 달 사이에 20배가 넘는 ‘나눔’을 할 수 있는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서도 작은 것들을 사용해 약한 무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2009년 10월에 있었던 라열라시마 지역의 대홍수 때도 내려놓음이 인생의 위대한 사건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해 10월 초 발생한 집중호우로 안드라푸라데쉬주의 쿤드강과 퉁가바드라강이 범람해 강 주변의 마을과 논밭이 여러 날 동안 물에 잠겼습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사람이 생명을 잃었으며 6만3000에이커의 논밭이 침수돼 엄청난 재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홍수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지역은 저를 일꾼으로 따스하게 맞아준 지역이었고, 저를 형제로 받아준 사람들이 생활하던 지역이었지만 선뜻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여러 망설임 끝에 있는 그대로의 상황과 형편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12명으로 구성된 구호팀과 함께 피해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은 300여 세대 분의 쌀과 기름, 달(녹두의 일종), 숄. 셔츠 등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조나와람, 넬라뚜르, 닫다날라, 네멜라딘네, 발라빠나 구두르, 가르셀루르, 라졸리에서 배고프고 지친 수재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둘째 날엔 구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방문과 전화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큰 마을 하나 정도 분량인데 여러 마을로부터 절박한 구호 요청을 받아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할 수 없어 급한 대로 개인 신용카드로 쌀과 기타 물품을 추가로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빚을 어떻게 갚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 아침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구호팀 단원 가운데 한 분이 100만원 정도를 헌금해 주셨습니다. 구호현장으로 가는 길에서 한국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기도 중에 저의 모습이 보였는데 너무 힘들어 보여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이어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도 기도 중에 제 모습이 여러 번 떠올라서 확인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분들은 그날 1000만원을 헌금해 주셨습니다. 연이어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결과적으로 1, 2차 구호활동을 통해 750세대의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고 남은 성금은 뉴델리의 그룹홈에 전달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네멜라딘네에서 가루셀루르로 가기 위해 쿤드강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위로 흙탕물이 넘쳐흘러 위험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강 건너 편에 사는 형제자매들이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린다는 생각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몰고 다리로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다리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차가 멈췄습니다. 홍수로 인해 다리의 이음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위험해서 건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서 발끝까지 쭈뼛해지며 진땀이 솟았습니다.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추락사’라는 신문기사 제목이 떠오르며 무모한 행위라는 사람들의 비난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동행한 분들에게 안전을 생각하지 못했음에 용서를 구하고 숨이 멎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운전사가 다리 우측에는 문제가 있지만 좌측으로 붙어서 가면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라며 시동을 걸었습니다.
차가 다리를 빠져나오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실감 났고 가르셀루르 주민들이 제 몸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내 생명과 맞바꿀 뻔했던 가르셀루르 사람들이 귀하고 사랑스러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었습니다.
내려놓음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능력을 입고 사는 지름길임은 배우고 또 배워도 모자랍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선교를 어떻게 담아 내야 하는지 고민하며 오늘도 주님께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옥희 인도 선교사
● 이옥희 선교사
-1956년, 전북 이리여고·한신대·한신대 신대원 졸업, 1991년 목사 안수
-기장 총회·전서노회 1997년 파송
-기장 총회 파송 남인도교단 선교사(현)
-비전아시아미션 파송 인도선교사(현)
-인도독립교단 실맛신학교 한국 협력 책임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