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 속의 정형… 평생 ‘배압법’ 외길 추상화가 하종현 화백
입력 2013-10-06 17:03 수정 2013-10-06 17:08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화면에 물감을 붓질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앞으로 밀어 넣는다. 기존 회화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이다. 서울 한남동 표 갤러리에서 11월 2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대표적인 추상화가 하종현(78) 화백의 작품이다. 캔버스의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넣는 방식인 ‘배압법’은 세계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이다.
이 작업은 1974년부터 시작됐으니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올이 굵은 마포의 뒷면에서 힘 있게 누르면 천의 거칠고 성긴 틈 사이를 통해 앞으로 물감이 배어나온다. 작업을 하는 동안 작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앞으로 밀려나온 물감들은 ‘접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앞쪽과 뒤쪽의 연결, 성질이 다른 것끼리의 만남, 세상 모든 것의 소통을 의미한다.
지난 주말 경기도 일산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이 언저리를 지그시 눌러 놓았을 때, 그 자체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예요. 저는 되도록 말하지 않는 쪽에 있고 싶어요.”
경남 산청 출신인 작가는 1959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62년 신상회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에 등장했다. 이후 69년에 창립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장으로 활약하며 실험의 선봉에 섰다. 당시 용수철, 철사, 철조망 등을 사용한 작업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를 유린했던 군사정권에 저항하기도 했다.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김창열 등 작가들과 동시대를 보냈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40여년간 재직한 그는 작업과 함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86∼89),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1988), 서울시립미술관장(2001∼2006) 등 행정가로도 활동했다. 2001년부터 홍익대 퇴임 후 받은 퇴직금으로 상금 1000만원의 ‘하종현미술상’을 제정해 후배들에게 상을 주고 있다. 2010년부터 화려한 색채가 들어간 ‘이후접합’ 연작에 몰두하고 있다.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되는 그의 작품은 뚜렷한 형태가 없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도 있고, 한국 토속의 원형을 발견할 수도 있다. 1997년부터 한글 자모를 토대로 창안한 서체 형태들을 화면에 구현하고 있다. 한글날에 전시돼 뜻 깊다. 그는 “언뜻 보기에는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똑같은 걸 반복하지 않는다”며 “세종대왕처럼 나만의 작품을 창조해야겠다는 각오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로버트 모건은 작가의 작품에 대해 ‘조용한 저항’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회화는 비교적 고요하지만 침울하지는 않다. 침묵을 표현하기 위해 뒷면에서부터 앞면으로 들어오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원기왕성하고 자유분방함으로 화면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성장을 중단하지 않는 그의 열정과 실험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02-543-7337).
글·사진=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