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오르간 선율서 신의 숨결·평등의 역사 떠올리다
입력 2013-10-06 17:50 수정 2013-10-06 22:46
독일적 풍경 파이프오르간 미니 예배 콘서트
딱 15분. 그 짧은 시간에 예술의 세계로 침잠했다. 독일에서 가장 크다는 7200여개의 파이프가 만들어내는 깊고 풍성한 선율이 신의 숨결처럼 사람들을 휘감았다. 잠시 세상의 소음에서 차단되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으로 미끄러져갔다.
“음악과 내적 휴식, 기도가 있는 이 모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치리리∼.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시작되자 나지막하게 들리던 웅성거림마저 멈췄다. 영국 바로크 작곡가 제레미아 클라크(Jeremiah Clarke)의 ‘덴마크 왕자를 위한 행진곡(Prince of Denmark’s March)’.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렸던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장에서 울렸다는 그 곡이다. 이탈리아에서 친구와 왔다는 50대 여성 피오렐라 로메(Fiorella Rome)는 “우리나라와 다른 건축 양식을 보러 왔는데, 마침 이런 행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렀다”며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들으니 평안해진다”고 말했다.
지난달 10일 정오, 독일 수도 베를린의 베를리너돔교회가 마련한 ‘안다흐트(Andacht·기도회)’에 갔다. 두 곡 정도의 오르간 연주, 그리고 경구 같은 설교와 찬송이 있는, 초미니 오르간 콘서트인 셈이다. 안다흐트는 배려와 하모니의 ‘조치알 정신’을 생각나게 하는 가장 독일적인 풍경 중의 하나다. ‘국민교회’(VolksKirche·국가 수장이 교회 수장을 겸하지는 않는 정경분리 형태) 제도를 채택한 독일에서 웬만큼 큰 교회나 성당에서는 거의 제공하는 약식예배다. 베를리너돔교회는 1997년부터 월∼토 매일 정오에 열고 있다.
두 번째 곡은 바흐의 프렐류드(Preludium)였다.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다는 장중한 선율이 파이프오르간을 타고 흘렀다. 1905년 자우어(Sauer)사가 제작했으니 오르간의 나이는 100살이 넘었다. 신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건축물, 그래서 거대한 돔 천장이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실내. 사람들 얼굴에 평화가 내려앉았다. 금박 프레임을 둘러 더욱 빛나는 성모자상 스테인드글라스가 내려다봤다.
옛 동베를린 지역인 동물원(Zoologischer Garten) 역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는 카이저빌헬름 교회에서의 안다흐트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교회의 명물인 스테인드글라스 때문이다. 통상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성서 속 이야기를 구상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이 교회 것은 추상적이다. 교회 안에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가 파란 빛을 내며 푸른 바다 혹은 거대한 창공처럼 펼쳐져 있다.
프랑스의 유리 예술가 가브리엘 루아르(Gabriel Loire)가 1만6000장 이상의 유리 모자이크 조각을 이어 만든 작품. 그 파란 스테인드글라스를 배경으로 예수상이 승천하듯 공중에 매달려 있다. 교회 문을 들어서면 신비로운 정경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교회 건축물 자체도 2차 대전 때 폭격을 맞은 원형에 복원 작업을 거치고 벌집 모양의 신관을 증축하면서 전후 모더니즘 양식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처럼 서로 다른 건축 양식과 미감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갖춘 교회를 하나로 묶는 건 파이프오르간이다. 오르간은 유럽에서는 일반적인 악기이지만 특히 독일에서 그 역사가 깊고 풍부하다. 16세기 후반 종교개혁을 단행한 마르틴 루터는 교회 내 음악의 역할을 중요시하면서 오르간 사용을 권장해 웅장한 음색을 갖춘 대형 오르간이 계속 제작되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이전까지 사제만 부를 수 있었던 찬송을 평신도에게도 허락하는 ‘회중 찬송’이 생겨났고 파이프오르간을 배경으로 코랄(독일식 찬송가)이 번성했다. 파이프오르간이야말로 그 역사성에서 평등과 공존의 조치알(sozial) 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악기인 것이다.
악기의 성격 또한 그렇다. 수천 개 파이프를 조합해 플루트, 오보에 등 각종 악기를 연상시키는 음색을 수십개에서, 많게는 100개 가까이 만들어낸다. 그 자체가 거대한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 안에 숨을 불어넣었듯 오르간도 숨(바람)을 불어넣어야 소리를 낸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악기, 파이프오르간. 그것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의 연주를 들으며 청중은 인간에 숨을 불어넣은 신의 숨결을 떠올리게 되고 평등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15분 오르간 기도 콘서트는 교인뿐 아니라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리지 않고, 내국인 외국인을 구별하지 않는 그런 개방적인 자세, 그것 역시 조치알 정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카이저빌헬름교회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인 볼프강 자이펜 베를린국립예술대학교 교수는 “선곡을 할 때 교회 음악뿐 아니라 일반적인 클래식 곡을 선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제 안다흐트는 외국 관광객에게도 알려져 독일을 상징하는 풍속이 되고 있다.
베를리너돔교회 입구에서 안내를 맡은 페드로 피네라(Pedro Pinera)는 검은 얼굴에 흰 이를 환히 드러낸 채 “인근 직장인도 오지만 아무래도 주중이라 관광객이 많다”면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유럽 관광객도 있지만 한국 일본 등 동양에서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파이프오르간 뮤직의 조치알적 속성은 이렇듯 관광객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래도 그 정신을 가장 뼛속 깊이 느끼는 이는 일상적으로 교회에서 클래식을 접하며 영혼의 자양분으로 삼는 독일인들일 것이다. 오르간 문화가 키운 인성은 공존과 조화의 정신에 바탕을 둔 독일 문화예술의 힘이 되고 있다.
베를린·드레스덴=글·사진 손영옥 문화생활부장 yosohn@kmib.co.kr